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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떼아뜨르 봄날의 <엘렉트라>
  •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 승인 2020.10.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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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응? ...아니.” “...바람 소린가?”

이럴 때가 있다. 어떤 소리를 한 사람은 듣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할 때. 아니, 아닌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걸 한 사람이 헛들은 걸까? 아니면 혹시 둘 다 들었는데 다른 사람이 무시해 버린 건 아닐까?

 

흰옷과 검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배우들이 합창단처럼 줄지어 들어와서 정해진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다. 잠시 후 무슨 소리가 났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살펴보니 배우들의 입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나고 있다. ‘뭐래는 거야?’ 귀를 기울였다. ‘적? 옛적? 아! 옛날 옛적!’ 방향도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바람처럼 불어왔다. “옛날옛적, 옛날옛적, 옛날옛적!” 불어온 소리는 알아채기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연극 '엘렉트라'는 '오이디푸스(2015)', '안티고네(2017)' 등 고전 비극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 선보였던 극단 떼아뜨르 봄날(이수인 연출)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중장기 프로젝트의 예술적 목표인 '보컬 시어터(vocal theater)' 작업을 위해, ‘사이코-리얼리즘’을 표방하며 선보인 소리 위주의 감각적인 연극이다.

딸(이피게니아)을 제물로 바쳐 죽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아버지(아가멤논), 돌아온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클리타임네스트라), 그 어머니를 죽이려는 딸(엘렉트라), 복수를 위해 다시 돌아온 아들(오레스테스). 저주받은 아트레우스 가(家)의 이 지독한 막장드라마는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세 사람 모두가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오레스테스를 중심으로 한 모친 살해 사건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참혹한 운명 속에 던져진 주인공 엘렉트라의 고통과 주장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작품에는 아가멤논 살해의 정당성을 웅변하는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의 갈등과 대립 못지않게 운명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여동생 크리소테미스와의 극명한 차이에서 엘렉트라의 성격과 작품의 주제가 뚜렷이 드러난다.

살아남기 위해 현실에 타협하는 동생 크리소테미스와 달리 엘렉트라는 가난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운명에 저항하며 복수를 향해 나아간다. 그녀는 불같이 뜨겁지만, 함부로 춤추지 않고, 천박한 이기심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그녀에겐 비천함과 숭고함을 가르는 잣대가 있었다. 그것은 ‘정의’다. 정의가 인간을 꼭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 안위를 버려야만 했다. 정의로 가는 길은 실로 고단하다. 삶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거대한 힘이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고개를 숙일 것이냐 눈을 들어 마주 볼 것이냐. 예나 오늘이나 비극의 주인공인 보통 이상의 선인들은 그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통해, 두려움에 작아진 우리를 위로하며 삶을 헤쳐 갈 용기를 부추기고 있다.

떼아뜨르 봄날은 <엘렉트라>를 욕망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이유로 인물 하나하나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모두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누구나 욕망은 있다. 꿈틀거리며 일어났다가 잠잠해지고, 커졌다가 멈추고, 슬금슬금 기어 나오거나 때로는 툭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겹쳐지기도 하고 나눠지기도 한다. 욕망은 먼 데서 바람처럼 불어오기도 하고 느닷없이 펄럭 스쳐지나기도 한다. 욕망이건 원망이건 희망이건 모두 바랄 망자. 바람이다. 마음속에도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풀어 올라 소리가 난다. 부풀어 오르는 건 무섭다. 차오르는 물도 팽팽해진 풍선도 꿈틀거리는 욕망도 그렇다. 먼 옛날에서부터 무대 위로 불어와 우리를 스쳐 지나가 버린 바람결에 울음이 들었다. 바람 소리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떠돌다가 터지는 폭음도 끓어오른 주전자의 절규도 없이 그저 그렇게 서글프게 내내 맴돌다가 다시 멀리로 불어가 버렸다. 아니.. 아닌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 배우)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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