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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수의 무빙액트] 흑백다방에서 '노고지리'를 듣다극단 후암의 연극 <흑백다방>
  •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 승인 2020.11.2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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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의 무대가 다시 열렸다. 초연을 한 지 어느덧 예닐곱 해가 지났으니 이젠 좀 시들할 만도 한데, 이 작은 연극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고 폐막과 개막을 거듭하며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무대는 부산 남포동에 있는 다방. 80년대의 분위기를 간직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레트로풍의 다방이다. 정면 무대 뒤쪽에 턴테이블과 LP판들이 쌓여 있고, 그중에서도 의자에 세워져 있는 최성수의 <후인>이라는 재킷이 유독 눈에 띈다. 왼쪽에는 아직 그리는 중인듯한 거무튀튀한 유화 한 점이 놓여 있고 오른쪽 앞 무대에는 오래된 검정색 다이얼 전화기가 놓여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테이블 하나와 두 개의 의자. 중년의 한 남자가 한쪽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다방의 위치를 묻는 전화가 걸려 오고, 잠시 후,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배낭 가방을 멘 사내가 모자를 뒤집어쓴 채 뛰어 들어온다. 다방의 주인은 심리상담가이고, 마침 오늘은 부인의 기일이라 다방이 유일하게 쉬는 날. 찾아온 사내는 상담신청인이다. 차분하고 능숙해 보이는 주인과 언어가 부자연스럽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손님. 검은 돌과 흰 돌의 바둑 같은 그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정체를 드러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방주인은 전직 고문 수사관, 손님은 그의 폭력에 의해 양쪽 귀의 청력을 모두 잃고 오랜 세월을 적막 속에 살아온 피해자다. 피해자는 억울하다. 그 시절,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고 믿어주지 않았던 사실이 억울하고, 지구 돌아가는 소리만 들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긴 세월의 하루하루가 모두 억울하다. 죽고 싶다. 죽이고도 싶고. 또 동시에 알고 싶고, 듣고 싶다. 왜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는지,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불었던 친구들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러나, 당시의 수사관은 해 줄 말이 마땅치 않다. 그 후에 그는 고문과 폭력행위로 감옥에 가야 했고, 아내를 잃었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방을 지키고 있다. 할 말이 없는 사람과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의 외침과 침묵이 반복된다.

 

 

 

이 불편한 이야기를 왜 자꾸만 찾아가서 들여다보는 걸까? 

아마도 거기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고, 오늘도 여전한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

 

이 이야기의 시발점은 1982년에 있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다. 물론 그 역사성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82년의 어느 봄날. 부산 고신대 학생들이, 5.18 광주학살에 군대 동원을 용인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태도를 보인 미국을 비판하며 미문화원을 방화하고 유인물을 살포했던 사건. 까맣게 잊혀진 옛날이야기를 이 연극은 왜 다시 들추는 걸까? 그리고 관객들은 이 불편한 이야기를 왜 자꾸만 찾아가서 들여다보는 걸까? 아마도 거기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고, 오늘도 여전한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선과 악, 참과 거짓, 좌파와 우파, 네 편과 내 편, 피해자와 가해자. <흑백다방>은 오늘날 오히려 더 팽배해지는 이분법의 흑백논리를 커피에 타고 있다. 검은 물에 흰 설탕. 덧칠한 검은 그림 속의 수많은 색깔들. 그 위에 그리는 노란 동그라미. 분노와 슬픔의 사연을 앞에 두고 둥글게 돌아가는 레코드판. 그런데, 이 연극 무대는 다방임에도 노랫소리가 없다. 그것은 피해자 인물의 청력 상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우리 역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분노와 증오를 지나 화해와 용서로 가는 이 연극의 중간 어디쯤에 소리 없이 머리를 지나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긴 밤을 오가는 날은 어디로 가야만 하나 /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극의 끝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노고지리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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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연극 <흑백다방>

연극 `흑백다방-차현석 작. 연출`은 극단 후암의 대표작으로 1980년대 민주화 시절 발생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다루며 개인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 낸 작품이다. 부산 남포동을 배경으로 상처받은 사람에게 카운슬링을 하는 다방주인에게 과거의 사람 손님이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2014년 초연(정성호, 윤상호 출연)을 시작으로 각종 연극제의 상을 휩쓸어 화제를 일으킨 연극 `흑백다방`은 미국, 영국, 일본, 터키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며 영어와 일본어로 현지 배우들과 함께 관객들을 만나 온 작품이다. 어느 덧 400회 공연을 앞두고 있다. 특히 2016년 부터 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축제에서 `코리아 시즌`에 초청되어 영국 배우들과 함께 공연 해 온 연극 `흑백다방`의 영어 버전인 `BLACK AND WHITE TEA ROOM-COUNSELLOR- 는 현지관객들과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아왔으며 작품성과 대본을 인정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2020년 연극 <흑백다방>

2020.11.12-2020.11.29 후암씨어터

김뢰하, 최원석, 홍서준, 서진원, 김늘메, 박신후 등 출연

 

​작품을 쓴 차현석 작가는 대한민국 극작자 최초로 영국작가협회(THE SOCIETY OF AUTHORS)의 정식 회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흑백다방`은 한국의 대본을 세계인들에게 소개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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