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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A Better Tomorrow진남수의 무빙액트 ⑨-"의리", "정의", "운명" 같은 허황해보이던 단어들이 다시 현실세계로 밀착해왔다.

롱코트에 성냥개비. 거짓말 한 스푼 보태서 모든 사내 녀석들이 이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로 매캐하고 뜨겁던 그 시절, 거리와 교실 사이에 끼어 갈 곳 없던 10대들은 끼리끼리 삼류극장으로 몰려다녔다.

"빠바 밤빰 빠밤빠밤빰 빠라밤빰 빠밤빠밤.." 귀에 익은 오프닝 음악과 함께 푸르스름한 화면 위로 위조지폐 뭉치가 촤락촤락 넘어가고, 동그란 선글라스를 낀 폼 나는 사내가 지폐로 담뱃불을 붙일 때면, 어두컴컴한 화면을 올려다보던 아이들의 심장에도 불이 붙었다. 

암흑가의 보스였던 형 송자호와 경찰인 동생 아걸, 그리고 몰락한 신세가 되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마크.. 아니 그보다는 소마. 얼마 전, 수업 중에 한 학생이 물었다. "제일 좋아하시는 영화가 뭐예요?" "음... 글쎄..." 뭔가 아카데믹한 영화를 폼 나게 대고도 싶었으나, 역시 인생에서 뭐든 하나를 고르는 건 쉽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시네마천국의 필름처럼 수많은 영화의 명장면들이 조각조각 스치며 돌아갔지만 점점 눈앞으로 또렷하게 떠오는 건 윤발이형님의 모터보트였다. 그 장면이 되면 극장안의 누군가가 어김없이 박수를 쳤다. "와!" 극장안의 침묵을 깨트리던 그 후련한 감정과 묘한 연대감.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우리는 마치 당구장에서 승부를 못 가린 사람들 마냥 뭉기적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한 번 더?" "당연하지!" "두 번은 기본이지!"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다시 빠바 밤빰 빠밤빠밤빰, 위조지폐 촤라락, 담배불을 붙이고, 풍림각에서는 총을쏘고 다리를 다치고, 차를 닦고, 밥알을 튀기며 울먹이고, 보트를 돌리고 박수치고 "형을 왜 용서 못해!" 그러다가 40발쯤 총을 맞고, 그는 또 죽고 우리는 또 한 번 먹먹한 감동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열 네 번 혹은 열다섯 번. 새파랗고 이뻤지만 한편으로는 참 볼품없고 불안했던 그 시절, 쌍권총을 갈기던 우리의 영웅은 우리가 지닌 불안과 공포의 감정의 찌꺼기들을 저 멀리 날려주었다. 극장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거리며 되도 않는 발음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헹헹 시우셍 쪼이와이응워쏭완뉜 네이와이 워 쭤얍파이록컹띤..."

https://www.youtube.com/watch?v=dPVFB-gASlc

"홍콩의 야경은 아름다워!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니 아쉬워!"

유난히 쓸쓸했던 그 대사처럼 1997년 영국령이었던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홍콩영화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스크린의 스타들도 여러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작자였던 서극과 오우삼 감독은 미국으로 건너가 메가폰을 잡았고, 윤발이형도 헐리우드 영화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미국땅에서 그는 그저 '과묵한 킬러'일 뿐이었다. 심지어 자신도 "헐리우드는 나를 쌍권총을 든 살인기계로만 취급하려한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으니.. 이천년대 중반, 중국으로 주 활동무대를 옮기고 나서는 공자나 조조 같은 역사 속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어느 날, 훌훌 벗어던진 홀가분한 모습으로 홍콩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 56억 홍콩달러(한화 약 8천500억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히고, 아내에게 조금씩 용돈을 받아쓰는 검소한 모습으로 지하철을 타고 팬들 곁으로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역시!' 돌아온 따거를 보며 또다시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네 글자가 되살아났다. <영웅본색>

 

다시 홍콩이 뜨겁다. 17주째 '범죄자 인도법안(송환법)'에 반대하여 시위 중이던 홍콩 시민들은 복면금지법이 발의 되자 다시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무렵 sns를 통해 한 장의 사진이 퍼져나갔다. 촬영시점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검은 복장에 검은 마스크차림으로 한 시민과 거리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이는 바로 '따거' 주윤발이었다. 이미 2014년 우산혁명 지지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중국내 활동금지명령을 받기도 했지만, "돈은 조금만 벌어도 된다"며 의연했던 그는, 검은 복면의 사나이로 조용히 다가와 시민들의 힘이 되었다.

홍콩느와르. 느와르 혹은 누아르는 프랑스어로 검정색을 뜻한다. 화려함을 걷어내었으나 더욱 영롱한 영웅의 본색을 보며 30년을 살아오며 잊어가던 감동이 다시 꿈틀댔다. "의리", "정의", "운명" 같은 허황해보이던 단어들이 다시 현실세계로 밀착해왔다.

 

감나무엔 감만 대추나무엔 대추만 남았다.

뜨겁던 여름 지나고 겨울로 잠들어가기 전

나무는 세상에 제 이름을 낸다.

설령 열매가 없어 남들이 몰라주면 또 어떠랴

함께 물들어 조화를 이루고

떨어져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으면

그 또한 나무의 본색이요 아름다운 한 살이가 아니겠는가.

 

영웅의 본색이라. 거슬러보면 고대 비극의 주인공은 언제나 보통 이상의 선인, 왕이나 왕자 또는 영웅이었다. '선인'의 기준이 타고난 신분 혹은 계급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내어놓는 행동 속에서 영웅을 본다. 그가 품은 뜻의 고결함과 닥쳐올 해악 앞에 자신을 내어주는 그 행동의 값어치. 그들은 돈을 내어놓거나, 자리를 내던지거나, 고통을 받아 안거나, 대의 앞에 목숨마저 내어놓는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의'를 본다. 그렇다면 아직도 세상에는 영웅이 있다. 바야흐로 평범한 영웅의 시대다. 책임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친 어깨의 아버지도, 거리에서 불을 밝히는 사람들도, 이름이 있으나 없으나 보다 나은 세상의 미래를 꿈꾸는 그들은 영웅이다. 그러고 보니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의 제목도 "영웅"이었고, 올 겨울에는 왕용범 연출과 유준상을 비롯한 영웅본색 세대들이 드디어 뮤지컬로 만들어 <뮤지컬 영웅본색>이 우리를 찾아온다고 한다. 또 다른 흥분을 기대해본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영웅본색>의 포스터에는 볼수록 어색한 영문제목이 적혀 있었다.

'A Better Tomorrow' 이제 와 다시 보니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극작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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