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느낌의 현재 홍콩 영화는 이제 우리에게 그다지 존재감이 없지만, 20세기 후반만 해도 그 곳의 영화들은 우리들을 매혹시켰었다. 무협과 판타지, 그리고 누아르 장르들에서 보여주는 그 우아한 액션의 움직임은 마치 춤 사위 같았고, 스타일리시한 화면의 미장센과 함께 펼쳐지는 카메라 워킹은 배우들의 동작과 어우러져 하나의 무대 예술과 같았었다. 홍콩 영화는 그 자체로 장르가 되었고 브랜드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2024년 작 <구룡성채: 무법지대>. 그 화려했던, 그러나 홍콩 반환을 눈 앞에 두고 있던 불안한 시절의 1980년 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에서 정 바오루이(鄭保瑞) 감독은 그 시절의 홍콩 영화에 대한 추억을 환기시킨다. 그 시절 홍콩 영화를 즐겼던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시절에 만들어졌던 홍콩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추억을 소환시킬 만큼 익숙한, 그렇지만 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화면이 펼쳐진다.

구룡성채(九龍城寨)는 홍콩, 정확히는 구룡반도에 있었던 슬럼가의 명칭이다. 그 기괴한 구조의 외형으로 유명해서 많은 영화들의 무대가 되었다. 물론 홍콩 영화들이 가장 많았겠지만 다른 나라들의 영화에서도 적잖게 등장을 한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일 것이다.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를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때론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을 암시하는 묵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화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바로 이 기괴한 건축 구조의 지역 구룡성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이 곳을 삶의 터전 삼아 먹고 사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존재감의 캐릭터는 단연 구룡성채 그 자체다. 이 기괴한 건축물의 집합체는 홍콩의 역사 그 자체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홍콩인의 운명 그 자체다.

구룡채성(九龍寨城)으로도 불리는 이 곳은 복잡한 중국 현대사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1842년 난징 조약으로 영국에게 홍콩섬을 양도했던 청나라는 구룡반도내에 방어기지를 세웠는데 이 것이 구룡채성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후 구룡반도는 물론 그 외곽인 신계 지역까지 99년 조차지로 넘어가게 되면서 이 구룡채성 구역만 영국 지배 지역에 둘러싸인 육지의 섬처럼 청나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후 이 구역은 중국 현대사의 혼란과 격변기를 지나며 어느 나라의 공권력도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남게 된다. 공권력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이 곳을 지배하는 것은 정치나 철학, 도덕이 아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에 대한 갈망과 그 갈망을 먹고 사는 욕망이다. 이권을 둘러싼 범죄조직이 자연스레 이 곳으로 흘러 들어오고,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 마다 생존을 위해 흘러 들어온 불법체류자들이 이 곳에 머물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렇게 이 곳은 하나의 독특한 공동체로 공고해져 갔다. 구룡성채의 역사와 정체성은 곧 홍콩 역사와 정체성의 축소판이다.

주인공 찬록쿤(陳洛軍)은 밀입국한 불법 체류자다.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 등 중국 대륙에 큰 혼란이 있을 때마다 수 많은 사람이 홍콩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홍콩인에게 그들은 또 하나의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같은 중국인이었지만 같은 중국인일 수 없는 존재였다.

장 바오루이 감독

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방문했던 정 바오루이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옥상(베란다)에서 구톈러(古天樂)가 연을 날리며 린펑(林峯)과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이다. 영국은 중국정부와 홍콩의 회귀에 대해 논의를 시작할 때였다. 당연히 구룡성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과 관련하여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당시 홍콩사람은 다 그랬다. ‘넌 영국사람이야’라고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았고, 중국에 귀속되고는 ‘넌 중국사람이야’하면 ‘그런가?’하며 헷갈렸다. 홍콩사람들에겐 귀속감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이 바람에 흔들리다 연처럼 떨어지는 신세 같았다. 어디에 정착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았다.”

류영하는 <사라진 홍콩>에서 “영국 통치 시기 홍콩 정부는 내부의 분화는 물론 중국과의 분화, 분할 정책을 폈다. 중국과의 분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바로 ‘탈중국화’, 즉 정체성의 분리였다. 그 수단은 결국 경제 그리고 근대화였다.”고 말하고 있다. 홍콩은 모든 것이 자유로운 곳이었으나 또한 모든 것이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다. 홍콩의 중국인들은 홍콩내의 영국인들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도 제한을 받았다. 중국인내에서도 불법체류자는 더 낮은 3류계급의 인간이었다. 영국인은 중국인을 지배하고 중국인은 더 낮은 중국인을 지배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맞닿은 최전선이었으며 화려하게 꽃 핀 아시아의 자본주의를 상징했던 홍콩은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곳 중 하나였다.

“홍콩 사회는 영국과 홍콩(중국)인의 ‘인종끼리’ 사회였지만 무엇보다도 부유층과 빈곤층의 ‘계급끼리’ 사회였다……처음부터 홍콩 정부는 큰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홍콩의 사회복지가 너무 좋아질 경우 중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은 더욱 많아질 것을 늘 우려했다……2021년 조사에 의하면 홍콩 인구 7백만 명 중 26만 명이 여전히 극빈층의 주거 공간인 닭장집(cage house), 관짝집(coffin house)에 살고 있다. 홍콩인들은 홍콩에 살고 있었지만, 홍콩에 살고 있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상태를 ‘내적 망명’ 또는 ‘내부 방명’이라고 한다.” --- 류영하 <사라진 홍콩>중에서

영화는 두 세대에 걸친 이야기를 다룬다. 찬록쿤과 그 친구들의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 과거 아버지 세대 사이에 존재했던 해묵은 갈등의 골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남아서 아이들 세대의 운명마저 옥죄어온다. 홍콩의 신세대는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고 한다. 홍콩의 구세대가 친중국적이라면 신세대는 친홍콩적이다. 신세대는 중국과는 구별되는 홍콩인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2014년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사건은 그 정점이었다. 과거의 관계는 현재의 관계마저 지배하려 하지만, 젊은 세대의 선택은 다르다. 찬록쿤의 친구 AV(四仔)는 이렇게 말한다. “그 세대의 일이잖아.” 새로운 세대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 세대와 맞서며 자신들의 역사를 써나간다. 정 바오루이 감독이 언급한 옥상씬에서 구세대인 사이클론(龍捲風)은 신세대 찬록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연을 잡을지는 애들에게 달렸어. 공중에 떠 있는 저 연이 언제 떨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 시절 홍콩 누아르 영화들이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 둔 홍콩인들의 불안함을 드러냈다면, 정 바오루이 감독의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그 시절의 홍콩을 회상하며 또 다른 홍콩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구룡성채는 1984년 홍콩반환에 관한 중영공동선언이 체결되면서 중국의 암묵 속에 홍콩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1993년부터 본격적인 철거에 들어가게 된다. 철거된 후에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1995년 12월 22일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 공식 개원을 선언한다. 그리고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이 된다. 새로운 홍콩의 시작. 어떤 이에게는 중국인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을 것 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불안한 미래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홍콩의 시인 록풍(洛楓)은 1997년 7월 1일 쓴 그의 시 <도시가 늙으면>에서 그 불안한 심정을 이렇게 노래한다.

오늘 밤 자정을 넘기면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중략)

빗물은 점점 굵게 짜여

거리가 점점 기운다

팔과 어깨를 늘어뜨린 채 네 짙은 눈썹을 올려다보며

내게 답해 줄 수 있는지 묻는다

우리가 늙기 시작하면

이 도시의 젊음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건물 자체로 그로테스크한 존재였던 구룡성채. 이제는 철거되고 사라진 그 건물의 아우라를 영화는 잘 재현해 냈다. 그런 비주얼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가진 영화가 되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의 건물, 이제는 희미해진 홍콩 누아르 영화의 전설, 그리고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과거 홍콩 사람들의 삶. 어수선한 듯 하지만 자유로웠고, 비정한 듯 해도 서로 감싸줄 줄 알았던 도시. 과거의 홍콩은 이제 없다. 새로운 홍콩은 이제 그 곳 사람들에게 무엇일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디스토피아적인 느낌 물씬 나는 배경을 바라보며 찬록쿤과 친구들은 비정성채가 사라진 이후의 미래를 불안해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둬. 홍콩은 눈 깜빡하면 변하니까.”

“모든 게 변해.”

“상관없어. 절대 변하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현재 홍콩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어낼 수 있을 듯 싶다.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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