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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비바람이 못내 아쉬운 연모상사의 정③ 여창가곡 평조 우락 <바람은>
혜원 신윤복 <미인도>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구진비는 붓듯이 온다

눈정(情)에 거룬 님을 오늘밤에 서로 만나자 허고 판 척 쳐서 맹서(盟誓)받았더니 이 풍우(風雨)중에 제 어이오리

진실로

오기곳 오량이면 연분(緣分)인가 하노라

 

.........

바람은 땅이 흔들리듯 불고

궂은비는 퍼붓듯이 온다

눈짓에 걸어 둔 임을 오늘 밤에 서로 만나자 하고 판을 탁 쳐서 맹세받았더니 이 비바람에 제 어찌오리

진실로

오기만 올 것 같으면 천생연분인가 하노라

- 국립국악원 『풀어쓴 정가』 2018:94

 

 

장마철이다. 세찬 바람이 불고 비는 퍼붓듯이 내린다. 이 비바람에 이미 오시기로 단단히 맹세한 임이 혹여 오지 못할까, 그래도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폭의 그림 같은 시어로 담아냈다. 연모상사와 이별애상은 여류 시조에서 가장 빈번히 다루는 주제들이다. 『가곡원류』에 한글 노랫말로 전하는 작자 미상의 대표적인 연모상사의 노래다. 그리워 애가 타는 안타까운 심정과 풍우를 뚫고서라도 오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묘사적으로 표현한다.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기품을 놓치지 않는 이 노랫말을 선율에 얹어 부르면 어떤 노래가 될까?

 

인간적인 연모를 담은 자유로움과 동시에 고매한 여성미를 담아내기에, 창법으로나 형식미에 있어 응축된 긴장감을 전달하는 가곡은 어떤 형식의 노래보다 적절했겠다.

장맛비와 세차게 부는 바람을 표현하고 중장에 불쑥 등장하는 불규칙한 긴 사설을 노래 안에 넣으려면 비교적 빠른 속도감으로 거뜬하게 음악 안에 담아야 할 것이다. 낙시조의 우락(羽樂) 선율로 이 노래를 부른 이유일 듯하다. 우락은 우조(羽調)에 의한 낙시조(樂時調)―소가곡의 하나는 낙 계통의 악곡-라는 뜻을 가지며 남창과 여창에서 모두 부르는 곡조이다.

『가곡원류』에서 우락의 곡태(曲態)를 표현한 풍도형용(風度形容)은 “요풍탕일(堯風湯日) 화란춘성(花爛春城)- 요임금의 바람과 탕임금의 세상처럼 꽃이 만발한 봄동산 같다”이다. 비바람은 야단이고 마음은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요동치지만 담담히 흐르는 물같이 치렁거리는 멋을 살려 불러야 하는 곡이다. 그래도 비바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강한 음악적 도입이 효과적이다. 전주인 대여음이 끝나면 여창은 우락 <바람은>을 질러내는 높은 음으로 시작한다. 남창에서도 부르는 우락은 시조 <조다가>를 붙여 부르는데 첫 도입은 낮은 음으로 숙여서 부른다는 점에서 여창과 대조적이다. 여창 우락의 가사는 <바람은>이외에도 <제갈량(諸葛亮)은>, <만경창파지수(萬頃蒼波之水)에>, <물아래>, <유자(柚子)는>, <앞 논에>, <군불견(君不見)> 등 총 일곱 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노랫말에 따라 선율은 달라진다. 가곡은 한 곡씩 떼어 부르기도 하지만 갖추어 부를 때는 순서에 따라 여러 곡을 연달아 노래하는 연창 형식으로 부르는데, 이 때 우락은 평롱(平弄)에 이어 부르고 우락 이후에는 환계락(還界樂)이 따른다.

 

유교의 엄숙함이 사회 전반에 흐르던 조선시대 인간 본성의 자유로움과 여성미 넘치는 감성을 담은 시와 노래로 풀어낸 여류가객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들은 여성 주체들의 감상을 시와 노래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드러내면서 민간음악계의 주역이 된 기생 가객들이었다. 18세기 후반 이후 다양한 곡조를 엮어서 부르는 편가 형식의 가곡연행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19세기부터 민간음악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들은 가곡이라는 형식의 노래로 창법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이 엇걸어 부르는 가곡 한바탕의 양식을 등장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대부분 작자 미상인 여성 가곡의 가사는 『가곡원류』같은 가집의 말미에 따로 묶어 수록하거나 『여창가요집』같이 독립된 가집으로 편찬되었다. 국악원 본 『가곡원류』에는 총 856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중 여창가곡은 191수인데 ‘여창’이라는 항목을 따로 두어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분류와 학습의 편의를 위해 묶어놓았으리라 짐작된다. 많은 수의 여창 가곡과 여성 화자의 언어로 삶과 정서를 담아낸 시어들은 당당히 예술의 주역으로 등장한 여류 예술가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바람은>의 시상과 여성 화자들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흔치않게 조선시대 여성의 모습, 이들의 욕망과 생활상을 화폭에 담은 혜원(蕙園) 신윤복(신윤복 申潤福, 1758~미상)의 풍속화들이 떠오른다. 신윤복의 <미인도>에 담긴 여성은 여류 가객의 모습과 가장 흡사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화풍으로 볼 때 신윤복의 것이라 짐작되지만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아 훗날 <그리움>이라 지칭되는 이 그림은 우락 <바람은>의 시상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 전한다.

 

신윤복 <그리움>

 

하규일(河圭一) 전창(傳唱)으로 전하는 우락은 선가의 명인이었던 고 김월하 뿐 아니라 조순자, 변진심, 이준아, 김영기, 황숙경, 강권순 등 이 시대 여류가객들이 자신만의 음색으로 즐겨 부르는 음악이다. 곱고 단정하지만 동시에 이지적이며 섬세함의 개성이 살아있는 여류가객들의 우락 <바람은>을 ‘구진 비가 붓듯이 오는’ 장마비에, 그리움의 시상을 기억하며 감상해보면 어떨까.

 

노래-이승윤

https://www.youtube.com/watch?v=sJqGzRMlQh0

 

<국악한마당/KBS 전주>

 

 

 

김희선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

THE MOVE  Press@ithem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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