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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화의 연극세상 22현실과 연극을 이어주는 공간 혹은 삶과 죽음의 소통 프롬프터와 배우가 공존하는 분장실

 

연극 <분장실> (극단 RM, 송훈상 연출)

 

전쟁 이전과 이 후의 연극, 삶, 사회, 그리고 예술에 관한 변화와 끝까지 변하지 않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작지만 울림이 있는 소리를 전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극단인, 극단 [성좌]에서 뛰어나와 독자적인 연극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연출자 송훈상이 십년 만에 만든 극단이 바로 [RM]이다. rain maker, ‘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극단 [RM]은 극단 [성좌]에서 배우고 익힌 연극인의 기량과 재주를 활용해, 2005년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해 왔으며, 올해 2017년에는 [RM컴퍼니] 정기공연으로 일본의 현역 희곡작가 시미즈 쿠미오의 <분장실>을 송훈상 연출로 지난 1월 11일부터 22일까지 대학로에 있는 아트홀 마리카 2관 무대에 올렸다. <분장실>은 그동안 몇 차례 한국에 소개된 희곡이지만, 이번 공연은 원작에 가장 가깝게 공연해, 실질적인 한국 초연 공연으로 보였다.

일본인들은 이차 세계대전을, ‘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호명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과 유사한 ‘태평양 전쟁’이라는 호칭은, 작은 차이도 크게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의 상식으로 판단하자면, 나름 다른 의미와 성격이 있고, 은밀한 내재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분장실>의 작가 시미즈 쿠미오는 일본의 연극인들 가운데도 드물게, 이차세계대전의 경험을 그대로 유지한 채 생존하고 있는, 고령의 연극인이다. 이 희곡에는 지금은 극장에서 사라진 ‘프롬프터(prompter)’가 등장하는데, 무대에 등장한 배우가 대사나 동작을 잊었을 때,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대 중앙에 위치한 ‘프롬프터 박스’나 무대 옆에서, 배우에게는 들리지만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대사를 가르쳐주거나 동작을 지시해 주는 사람이다.

이 작품에는 이미 죽은 두 명의 프롬프터가 낡은 극장의 분장실에 머물러 있는데, 한 명은 이미 이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연극을 했던 여배우 A (홍예서 역)로 얼굴에 상처가 있고, 전쟁 중에는 대부분의 남자 배우들이 전쟁에 참여해, 남자 배역의 프롬프터를 주로 맡았고, 가끔은 남자 단역으로도 출연했던 경험이 있었던 인물이다.

또 다른 귀신은 여배우 B (김미준 역)로 여배우 A 와는 달리 이차세계대전 이후에 프롬프터로 활동하다가 죽었고, 지금은 유령이 되어 이 분장실에 머무르고 있다. 두 여배우는 프롬프터였지만 지금은 분장실에서 분장을 계속하고 있다. 둘 다 언젠가는 무대에 서게 될 것을 꿈꾸며, 끝없이 분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부조리하고도 비현실적인 이 설정은 이 작품이 현실과 연극을 이어주는 공간으로서의 ‘분장실’의 의미와 공연과 관객의 매개체인 ‘배우’의 보조적 자아로서의 ‘프롬프터’의 기능을 포함하는 매우 철학적이며, 동시에 심미적인 설정으로 읽혀진다. 두 여배우의 가장 분명한 구분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맥베스 부인의 대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여배우 A인 홍예서가 연기하는 맥베스부인은 전쟁이전의 표현법이고, 여배우 B인 김미준의 연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여배우 C (전서진 역)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고, 썩은 냄새가 나는 이 분장실을 이용하는 현역배우로 20년의 경력을 지닌 베테랑이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했던 프롬프터 여배우 D (박혜영)가 베개를 안고 들어와, 이제 자기 배역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흉기로 여배우 D의 머리를 내려쳐 쓰러뜨린다.

20년 경력의 자기 배역을 빼앗길 위험보다도,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한 보상 심리가 강했던 여배우 C가 내리친 흉기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가 분장실을 나섰던 여배우 D 가, 다시 귀신이 되어 ‘분장실’로 찾아오고, 결국 죽은 프롬프터 세 명이 안톤 체홉의 <세 자매> 공연을 준비하면서 끝나는 이 희곡은 프롬프터와 배우가 공존하는 분장실에서 살아있는 배우와 죽은 프롬프터의 단절된 소통의 방식이 삶과 죽음의 전환으로, 새로운 소통의 구조를 얻어간다는 매우 희극적인 발상과 함께, 현실과 연극을 이어주는 공간 혹은 삶과 죽음의 소통을 위한 공간으로, 프롬프터와 배우가 공존하는 분장실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보았고, 전쟁 이전과 이 후의 연극, 삶, 사회, 그리고 예술에 관한 변화와 끝까지 변하지 않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작지만 울림이 있는 소리를 전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복잡한 구조의 이 희곡을 진지하게 그리고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연출한 송훈상의 연출가로서의 저력과 미모와 기량이 뛰어난 네 여배우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 흥미로운 <분장실> 공연을 감상하게 되어 아주 즐거웠다. 특히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포샤 역에 정말로 잘 어울릴 것 같은 여배우 홍예서를 만난 것도 대단한 행운이다.

 

김창화 (상명대 공연영상문화예술학부 연극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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