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그해에 개봉한 영화 중 베스트는 어떤 작품이었을까? 꼽아볼 때 마다 생각이 참 많아진다. 좋은 영화는 많은 데 그 중에서 어떤 영화가 더 뛰어난 지를 고른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였는지 어떤 영화가 뛰어난 영화인지를 영화를 감상하고 평가할 때는 각 사람마다의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주제도 중요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시나리오의 힘도 중요하고, 배우들의 존재감도 중요하지만, 나의 경우는 비주얼적인 면을 주로 보고 기억에 남긴다. 영상을 구성하는 미장센이나 화면과 화면을 연결시켜주는 편집의 문법 등의 독창성이 주 관심사 다. 그것들이야 말로 영화가 다른 예술과 차별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므로 감독이 자신만의 철학과 독창성이 담긴 이미지를 작품에 잘 녹여낸 영화들 몇 편을 선정해 봤다.

1. 가여운 것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영화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이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1992년 발표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작가 역시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이야기의 무대는 19세기 말 빅토리아 여왕 시대다. 이 작품을 영상으로 표현한 란티모스는 세기 말 특유의 데카당스함과 기괴한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 시절은 낙천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벨 에포크의 시대였다.

풍족한 물질문명과 함께 국제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누리던 평화의 시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과학적 발견은 눈부셨으며, 그에 자극받은 예술적 표현은 확장되었고, 철학이나 문학등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통찰력은 보다 확장이 됐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분명 이전 시대와는 달랐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풍요로움 속에 비극의 맹아는 언제나 감춰져 있었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대는 아직도 남성 부르주아의 시대였고, 여성과 노동자,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지배, 제3세계 인민들에 대한 수탈과 착취를 통해 이룬 풍요와 안정의 시대였다. 그런 모습이 란티모스는 기괴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남성 부르주아 중심의 기괴한 자본주의에 관한 영화이면서 근대 여성의 잔혹사에 관한 영화이다.

19세기 말은 과학의 기술로 새롭게 탄생한 사진과 예술이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새롭게 탄생한 예술은 전통적인 예술과 문학에 자극을 줬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런 혼란스러움과 새로움에 대한 예술적 갈망과 실험이 넘쳤던 시절의 감성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초기 사진과 영화 작품의 거친 흑백 입자의 영상으로 시작된 화면 이미지는 점차 사진과 회화의 경계가 모호한 현대 시각 예술(이를테면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회화나 얀 사우데크의 사진 같은 이미지의)로 변화한다.

그저 실험적이고 괴기한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뿐 아니라, 그 이미지들을 통해서 19세기를 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우리 사회안에 내재한 불안함의 맹아들을 들여다보게 했다는 의미에서 이 영화를 최우선으로 꼽아 본다.

2, 아노라

나는 전통적이거나 일반적인 표현 방식보다는 스타일적으로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표현 방식에 있어서 재기발랄하고 창의적인 영화를 각별히 좋아한다. 몇 해 전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공동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말이다.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그런 의미에서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이 보여준 기괴하고 위험한 영상보다는 좀 더 재기발랄하고 경쾌하며 유머로 가득하다. 영화는 마치 세 가지 장르물을 연결시킨 것처럼 전개된다. 19금 수준의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시킬만큼 매우 야한 로맨스 영화처럼 시작한 이 작품은, 좌충우돌 왁자지껄한 블랙 코메디 영화로 넘어갔다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질서라는 차가운 현실을 관찰자적 시선으로 담담하게 카메라에 담는 방식을 거쳐서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먹먹하게하는 묵직한 한 방을 날린다. 진지한 이야기를 짐짓 진지하지 않은 척 능청스럽게 넘나들며 각 장르에 녹여내는 전개 방식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션 베이커 감독은 늘 그렇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 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성매매 노동자인 주인공을 통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그리고 하층 노동자와 상층 자본가로 대비되는 자본주의에서의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3. 오키쿠와 세계

그렇다고 내가 기괴하거나 재기발랄한 영상 이미지에만 현혹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차분하고 담담한 영상 이미지에 끌리기도 한다. 문제는 그게 얼마나 스타일리쉬하게 작품을 표현해내느냐에 있다. 그런 면에서 오래된 사진첩에서 부모님의 흑백 사진을 꺼내보는 느낌의, 어쩌면 수묵화를 보는  듯한 감성마저 불러일으키는 영화 한 편을 골라본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그런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비를 꾸역꾸역 모아서 제작한 이 영화는 작은 영화가 갖는 미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는 안세이(安政)5년, 서기 1858년을 무대로 시작한다. 이 해는 일본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안세이 다이고쿠(安政大獄)가 일어난 해이다. 마치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등 과거 거장들의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이 영화는 그 격변의 시기를 살아가는 밑바닥 하층 계급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상층부의 권력이 어찌되든, 국제 정세가 어찌 흘러가든 상관없이, 민초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하루 하루 땀을 흘려가며 먹고 살아야 한다. 온갖 차별과 비웃음을 견뎌내면서 말이다. 우리의 삶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희미한 흑백 사진처럼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카모토 감독은 삶의 의미를 묻는다. 구구절절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마음에 스며들게끔. 마치 빗물처럼, 하얀 눈송이처럼, 그리고 화선지에 퍼지는 먹물처럼.

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 영화의 미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비워냄' 아닐까?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누구나 그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그 비극성을 강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그런 클리셰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그 비극적 사건의 현장으로 부터 벗어날 생각도 없다.

감독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이 그 비극적 상황을 이해하길 바라고 있다. 보여주는 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보여지지 않는 화면을 통해서,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집중해서 화면 속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 시각은 강렬하지만 그 것을 마주한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인간은 보이지 않을 때 모든 오감을 동원해서 세계를 파악하려 한다. 그래서 더 풍부한 통찰력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영상에 재현한 글레이저 감독의 이 영화의 힘은, 이 영화가 단지 과거를 회상하고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의 문제를 환기시키는데 있다.

5. 로봇드림

이 영화의 미덕도 결국 '비움' 혹은 '모자람'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풀 애니메이션의 방식으로 캐릭터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풀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정교하며 섬세하다. 당연히 매우 많은 작화가 필요하고  제작비도 많이 든다.

이에 반해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로봇 드림>은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작업된 작품이다. 풀 애니메이션 작품에 비해서는 작화의 양이 훨씬 모자라다. 움직임은 당연히 절제되고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절제된 사용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란 것이다. 동작이 정지된 Hold 상태는 단순한 정지 상태가 아니라 감정의 여백이라는 효과를 동반한다. 그 여백을 통해서 계산적으로 배분된 움직임은 캐릭터의 감정을 보다 강조시키게 된다. 단순화된 만화체 캐릭터 역시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아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단순화된 캐릭터와 절제된 애니메이션만 이 작품의 비어냄과 여백을 나타내는 건 아니다. 대사라고는 단 한 마디도 없는 이 무성 영화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 작품은 개와 로봇이라는 두 존재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무성화된 캐릭터로 설정된 두 인물의 이야기는 그저 우정으로 읽힐 수도 있고 연애의 감정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인생은 늘 내 맘대로 안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인간은 매 순간 실수하고 후회하는 선택을 한다. 인간이란 그렇게 모자란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런 모자란 존재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베르헤르 감독의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영화의 황금 시기에 만들어졌던 추억의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장면들을 통해 그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한 영화다.

5+1. 구룡성채: 무법지대

다섯 편 정도를 선정해 보려 했으나, 늘 이런 걸 고르다 보면 마지막 하나를 놓고 갈등이 생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좋은 영화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편의 영화중에서 한 편을 더 골라봤다. 의외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적은 듯한 아쉬움 때문이다.

쇄락한 느낌의 현재 홍콩 영화는 이제 우리에게 그다지 존재감이 없지만, 20세기 후반만 해도 그 곳의 영화들은 우리들을 매혹시켰었다. 무협과 판타지, 그리고 느와르 장르들에서 보여주는 그 우아한 액션의 움직임은 마치 춤 사위 같았고, 스타일리쉬한 화면의 미장센과 함게 펼쳐지는 카메라 워킹은 배우들의 동작과 어우러져 하나의 무대 예술과 같았다. 홍콩 영화는 그 자체로 장르가 되었고 브랜드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화려했던, 하지만 홍콩 반환을 눈 앞에 두고 있던 불안한 시절의 1980년 대를 무대로 한 정 바오루이(鄭保瑞) 감독의 <구룡성채:무법지대>는 그 화려했던 홍콩 영화에 대한 추억을 환기시킨다. 그 시절 홍콩 영화를 즐겼던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시절에 만들어졌던 홍콩 느와르 영화들에 대한 추억을 소환시킬만큼 익숙한, 그렇지만 보다 업그레이드된 화면이 펼쳐진다.

건물 자체로 그로테스크한 존재였던 구룡성채. 이제는 철거되고 사라진 그 건물의 아우라를 영화는 잘 재현해 냈다. 그런 비주얼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가진 영화가 되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의 건물, 이제는 희미해진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전설, 그리고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과거 홍콩 사람들의 삶. 어수선한 듯 하지만 자유로웠고, 비정한 듯 해도 서로 감싸줄 줄 알았던 도시. 비정성채가 사라진 이후의 미래를 불안해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현재 홍콩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싶어진다. 과거의 홍콩은 이제 없다. 새로운 홍콩은 과연 그 곳 사람들에게 무엇일까?

한요한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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