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찔해지는 관능적인 화면과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경쾌한 음악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초반부는 마치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시킨다. 아무 정보도 없이 이 영화를 보러 들어온 이들이라면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 영화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라는 의문과 함께.

션 베이커 감독의 2024년 작 <아노라>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녀의 직업은 성 노동자, 직장에서는 애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해 다루려는 것일까? 성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겐 사랑 없이 상품처럼 거래되는 성이란 것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사랑과 섹스의 관계에 대해 다룬 흥미로운 영화가 떠 오른다. 프레데릭 폰테어 감독의 1999년 작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성 매매 관계로 만나서 관계가 반복되는 동안 서로의 마음까지 열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사랑과 섹스 둘 중 무엇이 우선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영화였다. 이 영화의 초반부를 보면 그런 연장선에서 남녀의 사랑과 욕망에 대해 다룬 영화가 아닌가 싶어지지만 션 베이커 감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영화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노라가 일하는 성 매매 업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 곳은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이 표출되는 공간이긴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질서가 철저하게 지배하고 이행되는 사회이다. 그 곳에는 노동이 있고, 구매자가 있고, 계약과 거래가 있다. 단지 거래되는 상품이 섹스일 뿐이다. 남자들은 금액을 지불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해 줄 상대를 선택한다. 그렇게 여성의 성은 상품화되고 소비되며, 동시에 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성을 팔아서 자기에게 필요한 수입을 챙긴다. 그리고 그 수입은 또 다시 스스로의 상품성을 올리기 위한 것들에 소비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 억압과 착취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고객과의 사이에서는 물론 포주와의 관계에서도. 그들에게는 서로의 필요에 의한 계약과 거래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 장면들은 고스란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흔한 풍경이다. 자본주의의 변화와 함께 성 매매 시장의 모습도 함께 변해왔다. 연애와 결혼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변해왔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전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그랬듯이 익숙한 장르 방식을 통해서, 그리고 하층 계급의 시선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발가벗기는데 여전히 관심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데이트라고 말하는 연애와 성 매매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그럴까? 하버드대 비교문학과 교수 모이라 와이글은 <사랑은 노동>이라는 책에서 그런 통념들에 대한 균열을 만들어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연애, 혹은 성적 거래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 이렇게 질문한다. 

“그런데 ‘남자가 저녁을 사 줬다는 이유로 그와 잔다’와 ‘그 저녁에 해당하는 돈을 줬다는 이유로 그와 잔다’가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시에 데이트는 돈과 성관계를 맞바꾸는 거래와 다르다고 할 때의 바로 그 모호함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 남자는 날 좋아하는 걸까? 그 여자는 단지 날 이용하는 걸까? 상대가 정말로는 뭘 위해 데이트할까? 궁금해한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00년대 초 자본주의의 확장 속에 저렴한 노동력의 시골 여성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데이트 문화는 당시 기성 세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젊은 남녀가 집 밖에서 단 둘이 만나고, 남자가 사주는 식사와 선물을 여성이 제공받는다는 것만으로도 기성 세대는 데이트를 성 매매와 동일하게 봤다. 그리고 공권력은 그런 행위들을 단속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존재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자본가들은 매력적인 젊은 여성들이 고객들을 더 많이 끌어오는 것을 부추겼다. 고객을 끌어들이는 여성의 매력은 곧 데이트 상대 남성을 유인하는 능력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했고, 여성은 자신의 그 상품성을 이용해 안정적인 신분 상승을 꾀했다. 여성들은 멋진 남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나보다 우월한 조건의 남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은 인생의 성공 여부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그런 것이 가장 이상적인 행복이라고 믿도록 강요된 사회가 지속되어 왔다.

아노라는 러시아 재벌의 후손인 이반을 성 매매 고객으로 만나게 된다. 아노라의 성적 매력이 마음에 들었던 이반은 아노라에게 높은 시간 수당과 함께 자기만의 독점적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제안하고, 결국엔 청혼에 까지 이른다. 이것은 신데렐라 신드롬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된 영화로는 게리 마샬 감독의 1990년 작 영화 <귀여운 여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션 베이커 감독은 그 오래되고 익숙한 동화의 소재를 반 동화적 이야기로 비틀어 버린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얼핏 낭만적인 프로포즈 같지만,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이 제안은 이반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부에 대한 공동 소유권을 매개로 해서 아노라의 몸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권을 갖겠다는 제안이다. 

M. 와이글은 위의 책에서 “장기 계약직이 결혼이라면, 데이트 자체는 흔히 현시대 노동 가운데 최악의, 가장 위태로운 노동 형태인 무급 인턴십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와이글의 말에 따르면 이 제안은 아노라로서는 거절 할 수 없는 최상의 거래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노라는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노라에게 결혼은 단순한 거래이상의 삶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와이글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이직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이직은 늘 쉽지않다. 그것은 늘 실패의 위험을 담보하게 되고, 자칫 그 실패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아노라는 그 계약 조건의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반의 속내를 거듭 확인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반은 다르다.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친구들을 만나 유흥을 즐기는 일에만 열중인 그에게 사랑은 놀이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M. 와이글은 “우리가 쓰는 비속어는 우리가 여전히 데이트를 여성에게는 일, 남성에게는 유흥이라 생각함을 시사한다.” 라고 꼬집고 있다. 결국 이 결혼은 아노라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이반의 재산에 대한 잠재적 공동 소유자란 의미도 현실적으로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아노라는 결혼과 함께 이반의 생활에 종속되고 만다. 적어도 결혼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성을 팔아서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던 일종의 프리랜서 노동자였다. 자신의 몸에 대한 독점적 사용권을 양도한 그녀에게는 거래할 상품이 없다. 그렇게 아노라의 삶은 이반에게 종속되고 말았다. 영국의 성 과학자 해블록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매매 여성에 비하면, 돈 때문에 결혼한 아내는 진정한 파업 파괴자다. 아내는 더 적은 임금을 받고 그 대가로 훨씬 더 많은 노동과 돌봄을 제공하며 전적으로 주인에게 얽매여 있다.”

이렇게 영화는 신데렐라 신드롬에 관한 허구성을 들춰내는 한 편으로 결혼 제도를 둘러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있다. 오랫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두 종류로 나뉘었다.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정숙한 여인과 몸을 파는 부정한 여인. 그런 구도하에서 여성의 역할은 집안에 제한되게 되었고, 모든 것이 금전적 수입에 의해 평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금을 계산 받지 못하는 전업 주부 여성의 역할과 노동이 존중 받지 못했다. 여성성은 순수하고 고귀한 것이라서 경제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신화와 함께. 하지만 성 매매 여성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요구했다. “성 매매 여성의 존재는 중산층이 여성의 본성에 관해 믿었던 모든 것에 도전했다.” (M. 와이글의 위의 책에서)

그녀는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 그러니까 계급 상승을 도모했지만 자본주의의 견고한 계급 질서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결국 아노라가 그토록 염려했던 대로 두 사람의 결혼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반의 부에 대한 권리를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꿈꿨지만 그 계약은 더 높은 계급의 힘 앞에서 무력했다. 그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결혼 증명서도 돈을 앞세운 계급 권력의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마치 새로운 장르물로 전환되는 듯 하다. 초반의 괸능적이고 로맨틱한 화면대신 좌충우돌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코믹 액션물 같은 화면이 전개된다. 거의 모든 출연진들이 이 시퀀스에 등장해서는 서로 대립하고 우왕좌왕 헤매며 충돌하다가 또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이른바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과정을 보여준다.

초반부에서 남녀간의 연애와 결혼, 혹은 사랑과 욕망이 얽힌 자본주의적 연애 이데올로기에 대해 꼬집었다면, 이 시퀀스에서는 본격적으로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추격전과 로드 무비를 연상시키는 이 블랙 코미디 장르의 시퀀스에는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계 마피아로 보이는 사람들도 그저 임금을 받고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더러운 짓을 처리하는 일개 피고용인일 뿐이다. 좀 더 달리 표현해서 말하자면 임금 노동자일 뿐이다. 그들의 내면에 원한 같은 악한 감정 따위는 없다. 그저 할당 받은 업무를 잘 처리해서 이 밥벌이를 잃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면서도 상대방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다. 마피아 하부 조직원이든, 성 매매 노동자이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계급의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단함을 서로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과 업무에 충실할 따름이다. 이 잔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협상도 하지만,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내모는 이들은 결국 가장 상층에 있는 소수의 자본가 계급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어울리는 품위와 취향을 드러내는 패션과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등장하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대신해서 더러운 일을 해결해 주는 피고용인(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상해 보이는 모습 뒤에 숨은 그들에겐 자신들의 견고한 계급적 이익을 지키는 게 중요할 뿐 상식이나 양심, 책임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법적, 경제적, 행정적 힘은 자본가 계급의 편이다.

매우 야한 로맨스 영화처럼 시작한 이 작품은, 좌충우돌 왁자지껄한 블랙 코메디 영화로 넘어갔다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질서라는 씁쓸한 현실을 관찰자적 시선으로 담담하게 카메라에 담는 방식을 거쳐서 결론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묵직한 한 방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션 베이커는 이전 영화에서처럼 하층 계급의 시선으로 이 냉정하고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신파에 빠지지 않고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잔혹한 현실에서도 그들이 살아갈 희망의 끈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람끼리의 진심 어린 연대를 말하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두 소녀가 꿈을 찾아 손을 잡고 함께 뛰어갔듯이 말이다. 그런 부분이 우리가 션 베이커의 씁쓸한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조금은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일어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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