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도시_2024 부산국제영화제 공식상영작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_전도서 1장 14절

바람은 문학을 비롯해 미술등 여러 예술 장르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소재다. 작품의 상황에 따라 그 의미와 상징도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성경에서도 바람은 여러 가지 의미를 상징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그것은 신의 목소리였고, 신의 분노였으며,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신의 손길이기도 했다. 또는 인간 삶을 위협하는 고난의 상징이었고,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어떤 도도한 흐름이었으며, 인생의 덧없음을 알려주는 메세지 같은 것이었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 1842년.

회화에서도 바람은 오랫동안 매력적인 소재였다. 화가들은 잡히지 않는 바람의 실체를 캔버스에 잡아 넣으려고 애 써왔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바람을 캔버스에 담아낸 화가는 19세기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아닐까 싶다. 터너는 특유의 붓 터치를 통해서 빛과 어둠을 이용해 바람의 성질을 잡아냈다. 터너의 그림에 담긴 바람은 예측할 수 없이 모호하고 불안한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회화에서의 바람은 때로 우리를 멀리 미지의 세계로 유혹하는 손길처럼 묘사될 때도 있다. 그래서 여행은 또 바람과 닮아있다.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 두렵지만 새로운 곳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바람과 여행은 또 인생과 닮아있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이다.

멀리는 샤트야지트 레이부터 가까이는 압델라만 시사코, 마티 디오프의 영화까지, 전혀 낯선 나라의 새로운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같다. 두려움 반 설레임 반. 몽골 출신의 여성 감독 카비주램 퓨레브-오기어의 2023년 장편 데뷰작 <바람의 도시>를 선택하고 기다리던 나의 마음이 딱 그랬다. 몽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유럽에서 영화 공부를 한 카비주램 감독의 삶 자체가 여행자의 인생일테고, 그의 내면에는 바람처럼 부유하며 섞였다가 흩어지는 두 가지 정체성의 감수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몽골인인 카비주램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다. 촬영지도 몽골이고, 출연자들도 모두 몽골어를 사용하는 몽골인 배우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자가 프랑스, 몽골, 포르투갈, 네덜란드, 독일, 카타르의 다국적이란 사실에서 이 영화가 담아내고자 했던 몽골의 현실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오랫동안 중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서 사회주의 국가로 지내왔던 몽골도 소련 붕괴와 함께 뒤늦은 개방 정책을 펼쳤다. 갑작스레 밀려들어온 서구의 자본주의 문화와 경제는 몽골 내부에 적잖은 혼란을 주며 사회적 모순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몽골의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준다.

영화의 무대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이다. 이 도시에는 몽골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60만 명 이상이 밀집해 산다. 영화는 이 도시의 모습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잡아서 자주 보여준다. 분지 형태를 한 도시 중심지에는 현대식의 고층 건물들과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외곽으로 나갈수록 산비탈을 타고 형성된 서민들의 낡고 허름한 주택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외곽 끝자락에는 몽골 전통의 게르 거주 지역이 있다. 이들은 2020년 대 들어 발생한 자연재해 조드 현상으로 인해서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돈이 없어서 주택을 구입 못하고 도시 가장 외곽 높은 곳에 게르를 짓고 산다. 그리고 이 게르 주거 지역은 조만간 정부에 의해 철거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울란바토르의 현실이다.

이 영화의 제목 <바람의 도시>는 영어 제목 <City of Wind>에서 가져왔다. 몽골어 원 제목은 'Сэр сэр салхи' 우리 말로는 '살랑 살랑 바람'정도로 번역되나 보다. 몽골은 초원의 국가라서 바람은 그 땅의 사람들과 익숙한 자연 현상일 것이다. 그 익숙한 자연 현상은 그 다양한 모습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그 땅의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바람이 부는 모습이 자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 속 도시는 몽골 특유의 황량함과 함께 활력 없이 멈춰 선 듯한 풍경이다. 바람이 사라진 것 같은 도시, 그래도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곳이 있다. 도시 외곽의 끝 너머 아무 것도 없는 산등성이, 그 곳에 있는 돌무덤은 주인공 제가 조상신을 만나는 장소다. 이 곳에서 제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조상신의 음성을 듣는다.

게르가 있는 지역에 사는 17살의 제는 마을 공동체의 영매다. 제는 자신의 몸에 접신한 조상의 혼령을 통해 마을 주민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또래 아이들처럼 졸업을 앞 둔 고등학생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손꼽을 만큼 우수한 성적의 학생이지만 졸업후의 진로는 불확실 하다. 이것이 지금 몽골의 현실이다.

유럽에서 영화를 배우고 활동하는 카비주램 감독은 지극히 현대적인 매체라고 할 영화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고향인 몽골의 현실을 담아내려 한다. 카비주램의 고향인 몽골은, 그리고 제의 고향인 울란바토르는 전통적 가치, 문화가 현대적 가치, 문화와 혼재되고 충돌하는 사회다. 달콤함을 품은 현대적 가치와 문화는 제를 비롯한 그의 가족이 속해있는 마을의 전통적 가치와 문화를 혼탁하게 만들고, 두 가지 문화와 가치 사이에서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방황하며 길을 잃기도 한다. 마치 폭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문명의 달콤함이 전통적 가치 속에 살던 이들의 마음을 흩뜨려 놓는다. 마티 디오프 감독의 데뷰작 <아틀랜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카메라는 보이는 현실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렌즈 그 너머의 것을 담아내려고 한다. 이런 문화 충돌을 표현하는 도구로써 카비주램도 디오프처럼 샤먼이라는 요소를 가져왔다. 무엇이든지 먹어 삼킬 것 같은 현대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움에 맞서는 전통적 가치와 문화를 상징하는 도구로써 샤먼은 꽤 유용해 보인다.

주인공 제 역시 이런 혼란스러움의 한 가운데에 있다.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듯 보여주던 제 역시 느닷없이 마음에 불어 닥친 폭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제에게서 영적인 존재도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제는 몽골의 황량한 대지 위에 덩그러니 놓이는 처지에 몰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현대 몽골의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인 동시에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한 인물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윤동주의 <바람이 불어>

샤먼이 작동하는 전통적 공동체가 보여주는 것이 성원간의 신뢰와 사랑, 그리고 정신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면, 높고 화려한 현대적 문명이 드러내는 것은 구성원간의 불신과 멸시, 분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이다. 카비주램 감독의 안타까움은 이렇게 화려한 문명의 무차별적인 확장에 의해 파괴되고 소멸되어 가는 전통적 가치의 미덕들을 향해있다. 비록 화려하지 않더라도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있는 생명뿐 아니라 죽은 생명까지 온 세상의 모든 것들과 대화를 나누려 했던 이들. 힘겨운 삶 속에서도 그런 높은 정신적 고양감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느껴지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고향에 불어 닥친 거센 현대화의 바람을 어찌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꺾이지 않고 견디기 바라는 전통의 고상한 가치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마치 김수영의 시 <풀>의 내용처럼 말이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을 물리적 법칙으로 설명하자면 너무 내용이 길다. 우리는 그런 과학적 법칙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정서적으로 이해하는데 훨씬 익숙하다. 몽골의 현실을 정치 사회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너무 내용이 길어진다. 이 영화는 그 사회적 모순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그 안에서 살아가고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저 담담히 카메라에 담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머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가슴으로 이해하길 원하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내쉬는 호흡이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처럼, 바람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대지의 호흡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은 황량한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영적인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외롭게 견디며 살아가는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손길일 수도 있겠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 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_ 인디언 수 족 '노란 종달새의 기도문' 중에서

참고 영상 자료

▶ CITY OF WIND | Teaser | Lkhagvadulam Purev-Ochir

https://www.youtube.com/watch?v=i___5NO1KnY&t=11s

▶ 부산국제영화제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75846&c_idx=410&sp_idx=554&QueryStep=2

▶ BIFF2024 감독 인사말 | 푸레브-오치르 라그바둘람 PUREV-OCHIR Lkhagvadulam | 바람의 도시 City of Wind

https://www.youtube.com/watch?v=i___5NO1KnY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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