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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엽의 미술생각 21산수화에는 이렇게 예쁜 그림도 있다, 전기 '매화초옥도'

 

전기,<매화초옥>, 종이에 수묵담채, 29.6×33.3cm, 국립중앙박물관(조선 19세기)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 그 틈 사이에서 우리는 매화를 만난다. 자태보다 향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 향을 품으려고 추운 시절을 홀로 견디며 겨울의 한 가운데를 건너 온다. 매화는 한 평생을 이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 머물지만 향을 함부로 내두르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매화의 이런 마음을 우리네 선조들은 닮으려고 했다. 청렴과 지조를 지키는 품격 있는 삶을 꿈꿨던 조선 선비들이 찾아낸 매화의 미학이다. 그래서 매화는 사군자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조선 시대 매화 그림 중에서도 빼어나기로 손꼽히는 '매화초옥도'를 그린 이는 고람 전기(1825-1854)다. 추사 김정희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던 그는 29년의 짧은 삶을 마쳐 추사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고 전한다. 역시 같은 시기 한국 회화사에 한 획을 그은 우봉 조희룡도 그의 요절을 두고 "흙이 정 없는 물건이라지만 과연 이런 사람의 열 손가락도 썩게 하는가"라고 비통한 심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이야기가 분명하다. 겨울 한가운데 산골에 초옥을 짓고 묻혀 사는 벗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져서 외롭게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려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훈훈한 그림이다. 그래서 인지 이 그림은 겨울 풍경임에도 따사롭고 정겹다. 마치 마음 넓은 벗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느낌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의 '역매인형초옥적중(亦梅仁兄草屋笛中/역매인형이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이라는 글귀에서도 이런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역매는 전기와 교분이 두터웠던 오경석으로 조선 말기 통상개화론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따라서 깊은 겨울밤 초옥에 앉아 문을 활짝 열고 피리를 부는 풍류객은 오경석이며,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다리를 건너 오는 붉은 옷차림의 인물은 작가 자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인물의 표현에서 이들이 예술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맺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이들은 그림에 대한 깊은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다. 특히 역관으로 활동했던 오경석은 청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전기에게 전하여 그의 작품이 새로운 감각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물심양면으로 신세를 졌던 전기에게 오경석은 벗 이상 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새로운 감각을 향한 전기의 실험이 돋보이고 있다. 기존의 산수화와는 사뭇 다른 감각을 엿볼 수가 있다. 마치 서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우선 화면에 여백이 없다. 눈꽃처럼 흐드러진 백매화는 아련한 서정성을 담뿍 뿜어낸다. 강물과 밤하늘, 매화밭은 은은한 먹색으로 거의 균일하게 처리했는데, 서양 수채화의 기법을 보는 것 같다.

산과 바위, 다리, 집 등은 전통 수묵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선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선이 드러나는 부분은 다리와 집이 고작인데, 그것도 윤곽선의 성격이 짙다. 전통 수묵화에서 선이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바위와 산에 나타나 있는 선은 서양화의 붓 터치 같은 인상인데, 이것이 입체감을 주고 있다.

이에 따라 바위와 산에서는 전통 수묵화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감이 드러난다. 또한 서양식의 원근법도 보인다. 그림 맨 아래 부분의 바위는 근경으로 붓 터치나 선이 선명하다. 원경인 산에는 옅은 붓 터치 만 보일 뿐이다. 이와 함께 전통회화의 조형법인 여러 각도의 시점이 골고루 쓰이고 있다. 앞부분의 바위는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이고, 산은 초옥에 앉은 인물이 올려다 본 각도다. 그리고 집과 매화나무는 눈높이에서 바로 본 시점이다. 동서양의 기법을 고루 사용하여 새로운 감각의 회화를 시도했던 전기의 정신은 지금 이 시대 예술가들이 받들어야 할 화두는 아닐까.

 

전준엽 화가, 저술가

THE MOVE  press@ithem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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