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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 ART CHOICE 100]_꿈의 미술_김영식 작가꿈의 미술

 

김영식의 그림을 무아의 그림이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 꿈의 미술이라 단언했었다.

피카소가 한없이 갈망한 무아의 그림세계. 그 그림이 꿈의 미술이 아닐까. 피카소가 살아 돌아와 김영식그림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김영식은 피카소의 부분부분을 몇 차례 만났다. 부지런하게 세상을 돌아보는 그는 세계에 이름난 그림이나 미술품에 대한 궁금증도 많아 직접 확인하고 즐기려함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늘 생각하는 사람, 늘 착상을 메모하는 사람, 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그는 잠시도 쉬질 않는다. 술도 담배도 하지 못하는 그는 모순에 취하지도 허영에 취하지도 못한다고 할까. 그는 꿈을 꾸고 있는 이성이다. 그의 미술이 꿈이 되기까지 그는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려 발버둥쳤다. 그는 실현했다. 미술이 꿈이 되고, 꿈이 미술이 되는 현실을 만들었다. 피카소보다 더 쉬운 그림 그리고 더 어리석도록 심오한 그림 그게 김영식의 <꿈의 미술>이다. 뼈 녹을 입시미술부터가 이미 서양석고에 신체가 마비된 미술길이 대학에서 서양미술사에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화단은 꿈의 미술에 반신반의한다. 아니 이해가 도저히 안 될 수밖에 없다. 줄기세포에서 자란 장기로 대처하며 유학으로 갈아치운 인조인간들이 어찌 꿈의 미술을 생각이나 하랴. 그래서 꿈의 미술은 현실에서 부서지거나 날아가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김영식의 미술은 미술이란 표현을 하는 자들로 봐서는 분명 꿈으로 끝나야할 환영이지만 생활에 찌들어야하는 현대문명 앞에선 위대하게 살아 숨쉬며 미소하고 아기처럼 정이 든다. 물론 미술인은 꿈을 만들기 위해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꿈은 만들어지질 않는다. 꿈은 현실로 돌아오고 자신의 미술은 그냥 그림이나 형상의 착각일 따름이었다. 언제나 꿈이 되는 미술을 그리도 갈망하며 순교되길 바랐지만 순교할 건덕지를 찾지 못하고 결국 냉혹한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한국에서 꿈을 먹다간 화가는 몇이나 될까. 세계 미술에는 또 얼마나 될까. 꿈의 미술은 누가 할까? 잠을 자면서도 일을 할 수 있을까. 잠을 깨면 잠이 아니다. 꿈의 미술은 무얼까.

김영식은 미술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미술을 보면 ‘만들어져 버렸구나’ 라는 게 맞다. 그의 미술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게 아닌, 현재에서 바로 과거로 가 버린다. 참 이상하다. 바로 완성이 되어 버린다. 보통의 미술은 완성이 아닌 완성을 위해 계속한다. 그 계속이 늘 미완이며 늘 현재일 뿐이며 어느날 그림의 완성은 곧 급격하게 자신도 함께 과거로 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곧 그림과 미술놀이는 거의 조화(造花)로 굳어진다. 사람들은 조화 앞에서 경의를 표한다. - 정효료수 (미술평론가)

 

 

 

 

김 영 식   KIM, YOUNG-SIC

 

1958 釜山生

嶺南大学校 応用美術学科 卒業

筑波大学環境DESIGN研究室

東京学芸大学大学院(美術教育專攻) 卒業

東京絃DESIGN研究所

金泉大学敎授(1994-2017)

現在、金永植 PATTERN DESIGN 硏究所所長

 

著書 오늘도 당신을 기다립니다 - 2002, 소담출판사

님은 늘 내 가슴속에 계십니다 - 2004, 21세기출판사

색은 꿈이다 - 2009, 도서출판 무송

あなたが愛しいだけです - 2009, 新幹社(東京)

당신의 소중한 색이고 싶습니다 - 2010, 해조음

생각하는 네모 - 2015, 도서출판 무송

78回 個人展

 

1993 Dangong Gallery (Daegu, Korea)

1995 韓国 INTERIOR DESIGNER 協会 展示館(Seoul, Korea)

1999 Space 129(Daegu, Korea)

2000 Gallery Gekkousou(Tokyo, Japan)

2004 Gallery Lamer(Seoul, Korea)

2005 Gallery Seoho(Seoul, Korea)

2006 Gallery Richart(New York, U.S.A)

2006 Gallery Orie(Tokyo, Japan)

2007 Godo Gallery(Seoul, Korea)

2008 中国人民対外友好協会展示館(北京)

2009 芦屋画廊(Ashiya, Japan)

2010 Gallery Oneul(Daegu, Korea)

2011 Gallery Irohani(Osaka, Japan)

2012 Gallery City Bank(Seoul, Korea)

2013 Gallery Seseong Artpia(Daegu, Korea)

2014 孔雀画廊(Tokyo, Japan)

2015 烟台市群衆藝術館(Yantai, China)

2016 Gallery 佑英(Osaka, Japan)

2017 Gallery 風画(Saidama, Japan)

2018 Gallery 佑英(Osaka, Japan)

2018 Gallery 인슈바빙 (Daegu, Korea) 等

 

 

김영식은 있는 것을 그리는 것도 없는 것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김영식은 그린다. 무엇을 그리나. 꿈을 그린다. 다른 사람도 그리질 않는가. 물론 그린다. 그러나 그들은 꿈을 그릴 수가 없다.

꿈은 꿀 수는 있어도 꿈은 그림으로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화가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잃었기 때문이다. 설령 꿈의 동굴로 들어갔었다고 해도 그 현상을 부정하고 파괴해 버릴 것이다. 그래! 미아(迷兒)들의 미술, 그 미아들의 무리가 되어 휩쓸려 다닌다. 그러다 김영식 꿈의 미술을 보게 된다. 국화빵처럼 찍어낸 꿈과는 다른 꿈을 보면서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아니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김영식의 미술이 꿈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부정한다. 아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 것을 빼앗지 않는다. 아이들의 주머니나 가방에 수십만 원 아니 십만 원만 있어도 돈독이 오른 어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착취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특히 돈 맛을 알수록 더욱 악랄한 방법을 써서 빼앗을 것이다. 기존의 많은 미술인은 김영식의 미술을 어떤 방법으로든 부정하고플 테다. 세상에 미술이란 이름을 달고 태어나는 자는 다 김영식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 생각한다. 그 다음 그들은 할 짓이 없다. 그들은 애늙은이가 되었다. 그들 미술은 남녀(男女)도, 사제(師弟)도 다 늙고 허물허물 뭉기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꿈의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만 절대 참회(懺悔)란 없다. 그들은 꿈의 세계가 없다고 말한다. 꿈의 미술을 말하거나 그러한 미술이 존재할 수 있다 고하면 비정상이라 한다.

꿈의 미술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들이 사장되기 때문이다. 그림 하는 자들은 글에 환장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미술이 정당화는 그것 뿐 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공상이다 즉 아이들에게 미래는 꿈이다. 젊은 날 깨달음과 의식이 없이 자란 미래는 끝없이 오르막을 오르는 것이다. 올라도 올라가도 힘이 붙이는 게 미래임은 뻔하다. 미술대학이나 화가들은 아이들에게 거의 꿈을 주지 못했다. 아니 아이들의 꿈을 착취하고 갉아먹어 버린 현주소가 오늘의 미술교육일지 모른다. 한국의 미술대학은 눈치만 가르쳤다 그래서 삭았다. 인간다운 미술을 가르칠 능력은 없어도 눈치미술은 잘 가르쳤기 때문이다. 미술은 위대하게 평균화가 되었다.

김영식을 꿈을 그리는 화가다. 김영식의 그림은 어른에게 꿈을 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꿈을 잃는 거라면 김영식의 미술을 인정하고나면 어른이 되어도 꿈을 잃지 않고 사는 방법을 알게 된다. 미술에 박사가 아닌 사람들은 김영식 그림을 좋아한다. 김영식의 그림을 한 점이라도 사 보아라. 그리고 벽에 걸어두고 보아라. 그러면 보이리라. 자신에게도 너무 아름다운 꿈이 존재함을 꿈은 잃지 말아야 한다. 꿈을 잃는 순간부터 불안은 급격하게 증가한다. 불안에 떠는 미술 짓이 아름다워야 할 미술을 편 가르기 한다. 구상과 추상으로 , 구상과 비구상으로, 그러면서 이상하게 덜 만들어진 반추상으로 한국미술협회의 어느 씨레배기들이 만들어낸 용어인지는 몰라도 그게 무슨 진리처럼 통용되는 곳이 미술이다. 미술은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선천성 소아마비도 많고 저능아도 많다. 어찌 보면 그 이상한 용어들이 당연할지 모른다. 미술이니까. 물에 물 타도 술에 술 타도 다 미술이니까? 소설에서 구상소설 비구상소설이라고 구분 지을 멍청이는 없다. 언어란 그 자체가 문학이다. 문학에도 없는 용어가 이상하게 배란되어 쏟아지는 미술세계는 늘 사생아의 놀이터다. 사실 미술에 있어 가장 큰 비린 정의가 바로 구상과 비구상으로 가른 사건이다. 미술의 실존을 가장 예리하게 바라본 성찰이다. 인간은 환영에 사로 잡혀 산다. 사람 속에는 신(神)이 있다. 그 신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동거하는 것이다. 현존해야하는 미술은 발명과 마찬가지다. 당대에서 한 사람이 발명 혹은 발견하면 그 다음 사람들은 복제 재생산의 의미 외에는 무엇이 더 있는가. 공급의 의미는 이미 네트워크란 용어만큼이나 고도화되게 발전해 있으니까. 김영식 꿈의 미술은 발명도 못되며 발견도 못된다. 김영식의 미술은 우리에게 흔하게 있어 왔으며 우리가 지겹도록 접해온 자궁(子宮)이기 때문이다. 연어가 회귀하듯 세월이 가면 그곳에 가야만 하듯 김영식 미술이 곧 인간의 미술이기 때문이다. 미술은 신비한 게 아니다. 인간이 신비하기 때문에 미술이 신비하게 비쳐지는 것이다. 인간의 신비함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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