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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기억해야 할 제주이야기, 4.3

 

곤을동 마을길

 

아픔의 역사 ‘제주4.3’ 현장을 가다

 

아름다운 섬 제주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제주 4‧3 사건”이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單選) ․ 단정(單政)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지난 2월 17일, 역사공부모임 ‘은하수 아카데미아’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홍보실장을 필두로 4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4‧3 사건을 전국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취지로 2박 3일에 걸친 제주 4‧3 답사여행을 떠났다. 4.3항쟁의 유적지인 제주 동부지역 일대와 북촌마을 등지를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첫째 날은 사라봉, 일본군 진지동굴, 화북 곤을동 마을, 환해장성, 북촌 너븐숭이, 서어봉 등 제주 동부지역의 4‧3 유적지를 돌아봤다. 날씨는 따스했지만 바닷바람과 오름의 바람은 차가웠다. 송승호 민족문제연구소 제주지부장의 강연을 듣고, 거센 바람을 헤치며 비극의 세월이 지나간 마을을 걸었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 중에서

 

그중에서 특히 큰 사건이 일어났던 너븐숭이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북촌 초등학교에서 주민들이 쓰러져간 비극의 날, 엄마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아기가 배가 고파 저고리 앞섶을 헤치고 죽은 엄마의 젖을 물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근처에는 제주 4‧3을 처음 대중에 알린 소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선생의 문학비 옆으로 쓰러진 엄마와 아기의 조각이 오도카니 누워있었다.

 

무명천 할머니를 추모하는 바느질 작업

 

답사 둘째 날은 박진우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사무처장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덕구 산전과 하귀마을 영모원을 들러서 무명천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할머니는 4.3 사건 당시 총에 맞아서 턱이 없어지자 무명천으로 얼굴을 둘둘 두르고 살며 마을 사람들에게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할머니는 오십여 년이 넘도록 4.3의 악몽을 잊지 못해 늘 자물쇠를 걸어 잠궜다고 한다. 할머니가 살던 작은 집은 4‧3 유족회가 구입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도록 개방중이다. 지척의 고향도 가보지 못하고 힘들고 아픈 생을 보내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용기를 내어 수십 년 만에 고향을 찾아간 할머니가 고향의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분들이 눈물을 훔쳤다.

저녁에는 간드락 소극장에서 준비한 위안부 故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꽃할머니> 공연이 이어졌다. <꽃할머니>는 서울거리예술축제의 공식초청작으로 원작 그림책을 극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13살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미소는 우리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픔과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를 담고 있었다. 할머니의 대사가 마음 아프게 기억된다. “난 꽃이 좋다. 꽃을 만지고 있으면 아무 걱정 안 하고 참 좋다.”

 

제주의 허파 곶자왈 숲

 

답사 3일차는 교래 곶자왈 숲과 천백고지 고산습지, 어승생악 오름을 찾았다.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일정은 조금 느리고 여유로웠다. 제주의 허파 곶자왈이 있기에 삼다수도 있을 수 있다는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무분별한 개발로 멍들어가는 제주 곶자왈에 많은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곶자왈 공유화재단 (www.jejutrust.net)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은 “ 4.3은 무고하게 죽은 민간인과 그 후손들이 폭도 또는 폭도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억울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4.3은 많은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으로 재규정되고, 직접 사과함으로써 ‘4.3폭동’에서 ‘4.3사건’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두 글자가 고쳐지는데 6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명박 정권 이래 극우세력들은 다시 4.3을 폭동으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훗날 ‘4.3’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폭동이나 사건을 넘어서 분단친일의 역사와 국가 테러리즘에 대한 저항과 분단에 반대하는 맥락 속에서 진정 올바른 이름을 찾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주 4‧3은 길었다. 7년 7개월 동안 알려진 것만 3만여 명이 죽었다. 진상조사가 확실히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4.3에 대해 연구하는 단체에서는 어쩌면 희생자들이 9만여 명을 넘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들 대부분은 제주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비극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며 그냥 묻히면 안 될 아픈 역사다. 제주 4‧3을 기억하고 알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글. 사진  한요나 기자

 

제주 4&#8231;3 희생자 명단

 

제주 4‧3 사건

 

4‧3 사건의 배경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얽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제주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전략기지로 변했다. 광복 초기의 희망과는 달리 제주에는 실직난, 빈곤, 콜레라,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일제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수탈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3‧1절 발포사건은 4‧3 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근로자 95% 이상이 참여한 유례없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은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청단원이 대거 제주로 내려가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4‧3’ 발발 직전까지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대가 지소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 뿐만 아니라 해안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 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1954년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자료제공 제주 4‧3 연구소

 

은하수 아카데미아 단체사진

 

은하수 아카데미아

시민역사 동호인 모임

 

각종 역사강좌 문화예술강좌 때로는 아웃도어를 겸한 기행

다양한 세대가 서로 공감하는 동호인 모임

햇수로 4년째 전국적으로 회원수 270명

그 대부분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 대중 문화에서의 제주 4·3 사건

 

《순이 삼촌》-(1978년 소설)

《잠들지 않는 남도》(1989년 노래)

《여명의 눈동자》(1991년 드라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주4.3》(1999년 다큐멘터리)

《야인시대》(2003년 드라마)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2013년 영화, 감독:오멸)

《비념》(2013년 영화, 감독:임흥순)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2014년 수필)

《4월의 춤》(2015년 노래, 루시드폴)

《송아지》 (애니메이션)

한요나 기자  Press@ithem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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