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전광준의 필름 모던클래식을 찾아서
전광준의 필름 모던클래식을 찾아서 ② 영화 '봄날은 간다'

 

내게만 가혹한 사랑은 없다

 

이번 달 필름모던클래식으로 감히(?) 선정해본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2001년작 <봄날은 간다>입니다. 이제는 촌스러울 법도 한 16년 전 충무로 상업영화가 웬일인가 의아해하시는 분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기에, 필자는 고백컨대 이토록 정교하게 연출된 사랑이야기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는 점을 주저 없이 밝혀둡니다.

개인적 취향에 의한 장광설이 아닌,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객관적이며 논리적 근거 몇 가지를 소개할 것입니다. 한정된 지면 관계상 가장 중요한 두서너 가지만 언급할 수밖에 없는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은 1998년 데뷔작이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삶과 죽음의 순간을 디졸브(화면과 화면이 서서히 바뀌는 기법)의 미학으로 절제시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었지요.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전작에 비하면 정말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평범한 구성과 일상적인 남녀 간 에피소드로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릇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 영화 속에 영화의 교과서라 불러도 좋을 만한 사실적 미장센들과 모티프(motif 영화 속에서 유의미하게 반복되는 요소, Film Art, David Bordwel 저)를 곳곳에 숨겨놓음으로써 관객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자신의 의도를 전달합니다. 이로 인해 대다수 관객은 영화가 평범해 보임에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상(感想)을 얻게 되죠. 일반 관객들이 느꼈을, 그 설명할 수 없을 감회를 일으키는 몇 가지 보편타당한 근거들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봄날은 가니 꽃이 피고 지듯 

사랑도 사람도 변해간다"

 

영화는 배우의 뒷모습을 담은 이미지들이 인상 깊은 컷마다 담아냈는데 <봄날은 간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언가가 ‘가는’ 모습이란 바로 ‘뒷’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목의 정서를 관객의 무의식에 닿게 하기 위해 감독은 의도적으로 뒷모습을 보통의 영화에 비해 빈번하게 담아냅니다.

뿐만 아니라 1분30초 남짓한 짧은 오프닝 동안만 ‘가, 가자, 가요’류의 간다는 대사가 6회나 등장합니다. 이는 빼어난 대사들을 줄 세워 관객의 귀를 매료시키려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선 있을 수 없는 패턴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어지는 ‘봄날은 간다’는 메인타이틀까지 합치면 7회나 되겠군요. 간다는 대사와 뒷모습의 이미지로 감독은 우리가 아끼고 사랑했던 무언가는 언젠가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동조(confirmity)시키고자 의도합니다. 허진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별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으니 이러한 근거로 충분해 보입니다.

헐리웃의 유명한 극작가 시드 필드는 자신의 저서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서 등장인물이란 극 속 대사와 행동이라고 언급했는데 영화는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보란 듯 보여줍니다. 상우와 은수의 캐릭터는 각자 좋아하는 음식에 관한 대사와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녹아듭니다.

라면(인스턴트 푸드)을 좋아하는 은수와, 김치(슬로우 푸드)를 담그고 북어 국을 끓일 줄 아는 상우는 어쩌면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던 거죠. (라면=은수의 라이프스타일=인스턴트식 사랑, 김치=상우의 라이프스타일=오랜 기간 지속되는 순정) 실제 은수의 대사 속에서 '라면'이란 단어는 모티프 motif로써 은수 입을 통해 자주 반복되어 제시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녀의 유명한 작업 멘트(?)인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는 아직까지도 복수의 예능프로그램에서 우스개로 인용되고 있기도 하죠.

 

 

그녀의 작업에 걸려든 상우는 은수에게 푹 빠지게 되죠. 그러나 이후 상우의 순정에 부담을 느낀 은수는 상우를 멀리하고 곧 다른 남자에게 쉽게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둘의 갈등이 시작된 1시간06분 지점에선 라면이나 끓이라는 은수의 말에 발끈한 상우가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며 발끈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녀에게 상우와의 사랑이란 한낱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식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은수라는 캐릭터를 혐오스럽게 설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름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게끔 장치를 해놓았어요. 아래 사진을 보세요.

은수가 상우에게 이별을 고하는 씬입니다. 제가 꼽는 영화 속 최고의 미장센이자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라는 명대사가 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은수의 후경을 보세요. 상우의 텅 빈 후경에 비해 조밀하죠? 둘의 대조적인 배경은 이들의 서로 다른 사랑 혹은 심리상태를 은유하고 있어요. 그냥 우연히 찍은 것이 절대 아니랍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객 입장에선 이러한 정보들은 모두 무의식으로 인식할 뿐이죠. 비슷한 맥락에서 은수는 라면으로 작업한(?) 상우를 문밖에 세워두고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자신의 방을 치우느라 정신없었지요. 위 쇼트의 복잡한 후경 미장센과 지저분한 방은 은수의 심리와 사랑을 상징합니다. 은수는 과거 이혼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상우의 순정을 향해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인물일 수 있다는 근거로 볼 수 있죠. 평범한 영화라면 ‘나 예전에 이혼한 상처가 있어서 복잡해!’라며 구구절절 대사로 쉽게 설명하려 들었겠죠.

마지막으로 영화 속 두 캐릭터를 유비하여 주목해야 하는데요. 바로 상우 할머니와 상우의 여자 친구 은수입니다. 실제 이 둘은 여러 모티프를 통해 동일선상의 인물로 상징됩니다. 아래 쇼트들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는 무엇일까요?

앞서 설명해드렸듯 이 쇼트에서도 ‘간다'는 제목의 정서에 맞게 은수의 뒷모습을 담아냈습니다. 은수의 양산과 옷 컬러에 주목하세요!

주인공 상우의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는(죽음을 의미) 씬의 마지막 쇼트입니다. 할머니의 양산과 옷 컬러가 은수의 그것과 동일하죠? 컬러가 은수와 할머니를 연관 짓는 모티프로 사용됐군요. 또한 은수의 상의와 할머니의 한복 색깔은 영화의 엔딩 씬에서 만개하여 입을 떨구던 벚꽃 가로수의 색과 동일합니다! 엔딩 씬은 영화 내내 상우에게 소중하기만 했던 사랑을 떠나보내는 씬이죠.

영화의 주요 텍스트는 상우와 은수의 사랑이야기지만 은수와 모티프로 연결된 할머니, 즉 상우의 가족사가 서브텍스트로 구축되어 둘의 사랑에 영향을 주고받고 있고 영화 속에 배친된 모티프들에 유사성, 차이, 변형을 두어 반복하며 여타 미장센의 요소들과 캐릭터 설정 이 함께 유기적으로 맞물리면서 자연스러움이란 이 영화 최고의 미덕을 만들어냅니다.

자연스러운 등장인물, 행동, 대사, 미장센, 모티프 등을 스크린 위에 섬세하게 직조해낸 감독의 특별한 위로는 이별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는지요.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라는 상우의 아픈 질문에 영화는 봄날은 가니 꽃이 피고 지듯 사랑도 사람도 변해간다고 답합니다. 그리하여 내게만 가혹한 사랑이란 없다고 말해주고 있죠.

 

전광준 영화칼럼니스트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월간 더무브 THE MOVE,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THE MOVE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