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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이념은 혁신이었나? 보수였나?‘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디 가서 무엇을 볼 것인가. 누구나 해봤음직한 상상이다. 나는 음악사상의 걸작들이 처음 공연된 현장에 앉아보고 싶다. 1000명이 출연한 말러 교향곡 8번의 초연 현장에서 청중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이 초연된 파리 샤틀레 극장은 오늘날 전해지듯 야유와 소란으로 난장판이 되었을까.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는 1813년 12월 8일 ‘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초연 현장이다. 당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출연한 음악가들의 목록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에 살리에리, 마이어베어, 훔멜, 슈포어, 첼로에 줄리아니, 더블베이스에 드라고네티 등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작곡계와 연주계의 초호화 멤버가 즐비했다.

어떻게 동시대의 이 위대한 이름들이 한 무대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이 음악회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적 이벤트였던 데 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평원에서 패주해 프랑스 땅으로 쫓겨났고, 덩달아 프랑스군을 몰아낸 오스트리아는 다음해 전쟁에서 부상 입은 병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보훈 음악회‘를 열었다. 이 자리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초연한 자리였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거대한 이벤트였던 만큼 당대 음악계의 대가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베토벤이? 자유 박애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공감해 나폴레옹에게 교향곡 3번을 헌정하려고 했던 그 베토벤이, 프랑스군이 쫓겨난 뒤에 축하하는 자리를 위해 곡을 썼을까?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낙후된 정치체제와 귀족들의 전횡에 몸서리를 치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과는 달리 베토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그에게 바치는 헌정사가 쓰인 악보 표지를 찢어 버렸지 않은가. 게다가 그 뒤 프랑스군은 침략군이 되었으니.’ 어느 쪽일까. 베토벤은 혁명파(친프랑스)였을까, 독일-오스트리아 민족주의파(반프랑스)였을까. 이미 두 세기가 지난 지금 베토벤의 내면에 들어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이 베토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기록을 전해준다.

베토벤이 35세였던 1805년은 격동의 해였다. 이 해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영웅교향곡의 표지를 철회했고 (찢어버린 것이 아니라 검은 색으로 휘갈겨 덧칠했고) 그러면서도 친 프랑스 색채가 농후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무대에 올렸다. 진보적인 정치범이 주변 의인의 도움을 받아 구출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혁명 직후 프랑스에서 유행한 ‘구출 오페라’의 전형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실의에 잠긴 베토벤에게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자기 영지에 함께 가서 쉬자고 제안했다. 그의 저택에는 침입자인 프랑스군 장교들이 들어와 있었다. 리히노프스키는 그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달라고 말했다. 격분한 베토벤은 의자를 들어 후작을 때려눕힐 뻔 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신속히 끼어들어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프랑스의 침공에 격노한 베토벤이 급격히 보수화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군이 패퇴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가 돌아왔을때, 베토벤은 기뻤을까. 이 시기에 귀가 거의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은 대화 상대방과 필담을 나눌 수 있는 ‘대화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 방대한 양이 남아있는 이 수첩들은 오늘날에도 베토벤의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는 당시 복고체제가 회복되고 억압적 시민감시가 돌아온 데 대한 그의 불만이 가득하다. 한 수첩에는 정치적 논의 중 ‘나는 예술가란 말이요!’라고 일갈하는 베토벤의 필적이 적혀있다. 상대방이 민감한 대화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보고 있다며 주의를 주자 그가 역성을 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내면은 복잡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프랑스 편이 되었다가 오스트리아 편이 되었다가 하며 정치적 노선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자유 평등 박애 이념의 전파자로서 프랑스 혁명에 공감했고, 침략자로서의 프랑스에 분노했을 뿐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이웃들이 겪는 전쟁의 수난에 동정했고, 프랑스를 쫓아낸 뒤 돌아온 보수왕정의 억압에 염증을 느꼈다. 그의 입장을 간결하게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실러의 텍스트에 의한 교향곡 9번 ‘합창’이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환희여, 너의 마법은 관습이 엄하게 갈라놓았던 것을 다시 결합하도다. 너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모든 인류는 형제가 되도다.” 여기서 보듯, 베토벤의 진정한 이상은 관습의 장벽을 넘어선 인간들의 하나됨이었다.

오늘날 SNS 세상에서는 정치적 신념 때문에 어제의 벗들이 연을 끊고 척을 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너는 나와 다른 편이로구나’라는 혐오가 가득하다. 이 편 저 편을 떠나 모든 인간 형제들을 이롭게 만드는 일에 공감하고 인간을 해치는 일에는 한껏 분노했던, 베토벤이라면 고개를 흔들 일이다.

5월 4일, 경기필하모닉은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한다.

 

유윤종(음악칼럼니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W5NsPOgy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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