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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그림 품은 프라도미술관 가다 ②‘검은 그림’ 연작 과 우스꽝스런 초상화
카를로스 4세 가족

 

스페인 마드리드는 미술관 관람만으로도 의미있는 여행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원작이 있는 소피아미술관도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찾는 곳이지만, 나의 경우 먼저 찾았던 작품이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이다. 프라도미술관이 소장하는 고야의 작품은 130점에 이르는데, 화가의 창작활동 초기 마드리드에서 겨울의 왕궁 내벽 가리개로 사용된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린 시기부터 말년에 망명을 갔던 프랑스 보르도에서 그린 <우유 파는 아가씨> (1827) 까지 전시실 여러 곳에 그의 회화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다. 이 엄청난 작품들 가운데 관람객의 발길을 가장 많이, 오래 잡아끈 작품은 그룹초상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한 민중봉기에 가담했던 에스파냐인 학살을 그린 역사화 <1808년 5월 3일>, 그리고 14편의 <검은 그림> 연작이 있는 별도의 전시실이다.

 

고야, 카프리초스 43번,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동판화, 1797-98

프라도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전 매표소 입구에 서있는 고야의 동상을 보게 된다. 언덕에 솟아있는 고야 동상은 인물화보다는 높은 대리석 받침대 위 기둥에 사면으로 빙 둘러 조각된, 고야의 회화와 판화작에서 따온 온갖 형상들에 더 눈길이 가는 조형물이다.

 'GOYA' 이름 아래 자유로이 누워있는, 당대 외설시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던 <옷을 벗은 마야>, 이 형상 위로 1799년에 출판된 판화집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의 기괴한 날개달린 동물들과 악령이 날개를 펼치고 있고, 그의 출생년도 ‘1746’이 새겨진 측면 하단에는 이 판화집에서 유명한 자전적 성격의 그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의 모티프가 자리 잡았다. 

당시 이미 청력을 완전히 잃었던 고야는 『카프리초스』를 통해 왕실과 귀족들의 취향에 맞춘 주문화에서 그릴 수 없던, 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험상궂은 마녀들과 마법의 세계를 상징하는 숫염소와 커다란 날개의 박쥐, 반인반수의 형상 등, 프라도에 있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동산>을 떠올리는 초현실주의적인 기괴한 형상들과 나란히, 당나귀와 원숭이로 우화시킨 멍청한 권력자와 이들에게 아첨하며 출세를 꿈꾸는 예술가, 술에 취한 탐욕스런 성직자들, 타락한 관리들, 성을 사고파는 젊은 남녀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이 판화집에서 풍자된다. 고야는 “이성에 버림받은 상상력은 있을 수도 없는 괴물을 낳는다. 이성과 하나로 합쳐지면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가 되고 경이의 원천이 된다” 말한다. 판화집 『전쟁의 참화』가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이를 동반한 상상력, 이는 여든 두 살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창작한 고야의 다면적이고 독특한 예술세계에 관통하는 모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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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에스파냐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사에서 태어난 프란시스코 데 고야는 서른 즈음, 그러니까 화가로서 출세에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토록 원하던 마드리드로 입성하게 된다. 마드리드에 상경해 태피스트리 밑그림만 그리던 고야가 당시 얼마나 마드리드 주류미술계에 편입되길 갈망했는지 입증하는 작품도 프라도미술관에 걸려있다. 1780년에 그린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이다. 처음 보면 ‘이 그림 정말 고야가 그린 것 맞아?’ 의아할 정도로 앞으로 그가 보여주게 될 예술에서 낯설고 이색적인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고야는 결국 이 그림으로 멩스의 신고전주의가 지배하던 에스파냐 왕립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고 정식회원이 된다. 그로부터 귀족과 권문세도가의 초상화 제작이 활발해지고 초상화가로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고야가 그린 초상화만 무려 350점에 달한다. 그 가운데에는 고야가 ‘내 것이다’ 하며 죽을 때까지 그가 소유했던 <알바 공작부인>과 섬세한 인물내면의 표현과 의상의 정교한 붓질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친촌부인의 초상>이 있다. 그런가하면 얼굴만 제대로 그리고 몸통은 대충대충 그려 넣은, 주문자의 지불능력에 따라 양손 혹은 한 손이 꼼꼼하게 그려지거나 아예 손을 그리지 않은 초상화들도 많다.

 

고야의 초상화에서 유명한 <카를로스 4세의 가족>(1800)을 비롯하여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 나중에 프랑스군에 대항해 에스파냐의 독립을 원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난 후 이 프랑스군의 비호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페르디난도 7세의 초상화는 모두 고야가 1786년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후에 그려진 것들이다. 당시 왕의 초상화는 대개 대외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수백 년 전통의 권위 있는 양식을 세심하게 모방하는 아카데미의 규범에 따라야 했고, 초상화는 그만큼 전통을 거부하고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기가 어려운 장르였다. 우리 조선시대 왕의 얼굴을 그린 어진화사가 터럭 한 올 점 하나 빼놓지 않고 그린 엄격한 화법과 전통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고야가 그린 왕과 왕실 가족의 초상화들은 파격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에스파냐에 혁명적 사상이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톨릭교회 종교재판소에 출판물 검열과 유대교처럼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는 권한을 부여한 카를로스 4세, 결국 정신쇠약으로 국정에서 물러나 사냥에 몰두했던 이 왕을 대신해 그녀의 정부인 고도이 장군과 함께 실질적으로 스페인을 지배했던 왕비 마리아 루이사. 『카프리초스』 첫번째 그림으로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묘사했던 고야는 이런 왕실의 초상화를 어떻게 접근했을까. ‘자연’과 ‘렘브란트’와 더불어 ‘벨라스케스’를 그의 예술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고야는 이 에스파냐 선배 궁정화가의 일명 <시녀들>에서 힌트를 얻어 거울에 비친 상을 다시 거울로 반사시킨 중층적 회화기법으로 권위적인 전통을 벗겨내고 전대미문의 우스꽝스런 왕실 초상화를 완성한다. “복권에 당첨된 빵집 주인” 같다는 인상을 주는 카를로스 4세 부부의 초상은 왕의 권위란 찾아볼 수 없는 멍청한 얼굴이고, 이제 서른에 접어든 젊은 왕비는 살찐 중년여성의 주름 패인 얼굴에 보석으로 잔뜩 치장한 모습이다. 초상화의 인물들은 마치 가족사진 찍기 직전처럼 죽 늘어서서 산만하게 흩어져있고 뒷줄에 선 카를로스 4세의 누이와 그의 뒤에 선 인물처럼 탐욕스럽고 속물적인 근성이 순간 포착된 캐릭터처럼 묘사된다. 이들이 왕실의 일원인 것은 오직 화려한 금빛 의상과 반짝이는 장식이 말해준다. 고야는 이 왕실 초상화에 선배화가 벨라스케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어두운 배경에 배치했지만 그림에서 유일하게 이 인물들을 모두 간파하는 듯한 눈빛을 가진 모습이다.

마리아 루이자 왕비 기마상, 1799, 338 x 282 cm

고야가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디난도 7세의 왕실 화가로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정말 흥미롭다. 특히 <카를로스 4세 가족> 초상화에서 중심인물인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고야가 그린 초상화로 영원한 이미지를 얻었다. 혼담을 목적으로 멩스가 그렸던 열다섯 살 때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제외하면 이 왕비의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은 모두 고야가 그린 초상화다. 허리를 콜셋으로 꽉 조인 곡선미에 화려한 의상과 머리치장으로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든 얼굴이다.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이 막강한 권력자의 거듭되는 초상화 주문을 고야는 놀랍게도 거의 이렇게 똑같은 패턴으로 그려낸다.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루이사 왕비의 기마상은 붉은 꽃을 단 모자와 승마복 차림에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이지만 이 초상화도 전통적인 영웅의 기마상 도상을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인물에 사용해 왕비의 허영심을 드러낸 희화다. 이 그림을 모티프로 한 재밌는 장면이 밀로스 포만 감독의 <고야의 유령>에도 삽입되었는데, 고야가 완성된 이 그림을 개막하자 왕비가 금방 안색이 변해 획 돌아서 나가는 장면이다. 이런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고도 어떻게 고야가 궁정화가로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점이 프라도미술관에 가서 좀 풀렸다. 그림의 화려한 색감과 실물의 등신대보다 좀 더 크게 그려지고 높이 걸린 화면의 크기에 압도되어 우러러보면서.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후원자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화가는 서양미술사에서 고야가 전무후무하다”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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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내면적 자화상 _‘검은 그림’ (Las Pinturas negras, 'Black Paintings')

 

프라도미술관 1층 특별실에 전시된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은 총 14점이다. 고희를 넘긴 고야가 중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소생한 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리하여 일종의 ‘유서’로 보는 관점도 있지만, 노년과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예술가의 내면 자화상에 더 가깝다. ‘검은 그림’ (Las Pinturas negras, 'Black Paintings')은 고야의 사후에 이 연작 그림의 목록을 만들다 붙여진 것으로, 검은색만 사용해서가 아니라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검은 그림> 연작은 1820년에서 1823년 사이, 고야가 생애 처음으로 매입한 마드리드 근교의 정원 딸린 집, 일명 ‘귀머거리 집’에 그린 벽화다. 그가 사는 집안의 1층 식당과 2층 거실 벽에 바로 그린 벽화였는데, 진흙 벽돌에 회칠한 벽이어서 오십년이 지나 복원할 당시 손상과 마모가 심했다고 한다. 지금 프라도미술관에서 보는 <검은 그림>은 벽화에서 벗겨내어 캔버스에 옮긴 것으로 당시 프라도미술관의 복원가였던 역사화가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쿠벨스 (1845-1914)의 손길이 여러 차례 닿았던 작품이다. 

고야에 관한 거작으로 유명한 일본의 문인 홋타 요시에는 이런 복원과정을 거친 그림을 원화라고 보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복원 초창기에 촬영했던 사진들과 비교하여 원화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낸 것으로 평가한다. 나는 요시에의 책 『고야』 (전4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를 읽으며 그가 실증적으로 조사한 ‘귀머거리 집’의 벽화 배치와 작품의 시선 방향을 따라 “공상 속 미술관”을 천천히 구경했었다. 스페인의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이 고야의 작품세계를 영화적으로 해석한 <보르도의 고야>에서도 이 연작을 그리는 고야를 재현하는데, 한밤중에 촛불이 일렁이는 모자를 쓰고 벽화에 두텁게 물감을 바르고 어두운 심연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기괴한 표정의 무리(<성 이시도르의 순례>)를 손으로 만져지듯 생생하게 그리는 장면이다. 어쨌든 프라도미술관으로 옮겨진 이 그림들의 배치는 박물관의 전시공간이란 제약 때문에 고야가 그의 집에 그렸던 벽화의 현장감을 상상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원래 공간의 일층과 이층에 각각 일곱 점씩 그려졌던 그림들이 일층 전시실의 양쪽 벽에 벽면의 공간 사정에 맞춘 듯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색감도 상상했던 것보다 밝았다. 그래도 반가웠던 점은 전시실 입구 맞은 편 안쪽 정면에 연작의 <개>가 있고 좌우로 <두 노인>과 <운명>이 배치된 것이다.

고야, 검은 그림 연작, 운명

 

 

고야는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낱낱이 그려낸다. “상상력은 나의 내면에 있는 사악함을 관찰함으로써 제어된다.” 그의 이 모토가 완성되는 작품이 바로 이 <검은 그림> 연작이다.

                                  ”

 

 

고야, 검은 그림 연작, 개

 

 

<개>는 비탈진 모래언덕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개가 여백을 노랗게 뒤덮는 격렬한 움직임이 말하듯 눈앞에 곧 닥칠 폭풍 같은 무엇을 예감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인터넷에서 찾은 복원 초창기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현저하다. 사진에서 개의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것은 연작의 <아시모데우스>에 그려진 것과 같은 거대한 바위산이다. 이로 인해 처음 이 그림에서 받은 인상이 좀 복잡해진다. 그래도 개의 눈동자가 눈가와 머리털처럼 밝은 색으로 처리된 것은 어딘가로 부터 빛이 떨어진 것이라 추측할 수 있고, 그러면 길을 잃고 어딘지 모르고 헤매는 이 가련한 존재에게 어둡게 드리워진 거대한 장애물과 더불어 이를 뚫고 나갈 한줄기 빛을 전망할 수 있게 한다.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에서 <사트루누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이 그림인데, 작가인 고야가 정말 이런 구원을 원했던 걸까. 말년에 늙고 병든 그를 보살펴 준 서른 두 살의 젊은 아내 레오카디아가 죽은 후에도 그의 무덤을 듬직하게 지켜주길 원했던 그림 <레오카디아>의 묘사를 보면 어쩌면 그랬을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 옆에 걸린 <운명>이 훨씬 더 고야다운 결론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을 희화시킨 작품이다. 세 여신은 고야의 그림에서 기이하고 우스꽝스럽다. 운명의 길이를 재는 신은 이빨 빠진 합죽한 입에다 눈이 멀었는지 감은 눈으로 돋보기를 들고 있고, 운명의 줄을 끊는 신은 가위질을 해야 할 손가락이 잘리고 이상하게 굽어진 다른 손은 허공에서 허둥댄다. 아기 형상을 손에 쥔, 운명을 나누어주는 신은 여신 가운데 그나마 멀쩡하게 보이지만 무너진 어깨선 아래 두른 옷자락에 팔과 하체가 꽁꽁 묶였다. 이 세 여신들 앞에 양손이 뒤로 결박당한 인물이 끌려와있는데 죽음을 맞은 젊은 영혼이다. 하지만 상체의 윤곽선과 근육이 강건하고 드러난 한 발로 곧 박차고 날아오를 듯한 기세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이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는 자유를 말한다. 그림 전체적으로는 비장하고 암울한 톤이지만 왠지 낄낄거리며 운명의 신을 비웃는 화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신의 운명을 대하는 노화가의 태도가 호탕해서 나는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두 노인>에서는 고야의 또 다른 자화상인 늙은 귀머거리 노인이 나온다. 악마가 옆에서 아무리 귀에다 대고 속삭여도 듣질 못하니 당연히 마음 흔들릴 일도 없다는 듯 얼굴이 태연하고 양손에 쥔 지팡이에 곧은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제 아들을 잡아먹는 사트루누스>. 첫 번째 아내 호세파와의 사이에서 스물넷의 자식을 낳았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하비에르, 같은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행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이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서 고야가 가졌을 죄의식을 끔찍한 악몽으로 묘사한 이 그림까지, 고야는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낱낱이 그려낸다. “상상력은 나의 내면에 있는 사악함을 관찰함으로써 제어된다.” 그의 예술의 모토가 완성되는 작품이 바로 이 <검은 그림> 연작이다.

 

류은희 객원기자 (독문학 번역가)

 

프라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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