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대단할 것 같았으나 되돌아보면 그저 평범했던 나날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다. 그 시간들이 의미 없었다거나 행복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를만큼 분주했던 시간들도 있었을 터고, 오롯이 혼자 견뎌내느라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흘렀던 시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곳에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흐르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간은 각 사람들에게 각 각의 속도로 흐른다. 몇 십 년이고 여전히 지속되는 관계도 있지만, 고작 계절 하나조차 함께 넘지 못했던 관계도 있었다. 그 관계 사이로 흐르던 시간의 양이 꼭 그 관계의 깊이나 의미를 다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 많은 관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 나갈 뿐이다.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로봇 드림>은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은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영화지만 세월을 견뎌낸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삶에 대한 통찰이 커피처럼 쌉싸름한 유머에 담겨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차가운 대도시 뉴욕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한 뉴요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의인화된 Dog이다. 영화는 이 Dog이 반려 로봇을 하나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인간과 반려 동물 사이에 관한 변주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퀴어 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며, 사랑에 관한 이야기고, 결국은 우리 삶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1, 가장 먼저 이 작품의 스토리보드 연출에 대해 언급하자. 실사 영화보다 훨씬 많은 면에서 스토리보드는 애니메이션 작품 작업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스토리보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곧 작품의 절반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다. 일반 실사 영화는 촬영 후 편집 과정을 통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지만, 애니메이션은 스토리보드와 애니메틱 작업에서 필름에 담길 쇼트가 결정되고 그 쇼트들간의 연결과 타이밍이 결정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감독과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그 작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자주 발견된다. 각 각의 쇼트들에서는 관객의 시선을 어디로 집중시켜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또 반대로 무엇을 감출 것인지가 명확하게 계산되어 있다. 그리고 쇼트와 쇼트는 또 얼마나 효율적인 방식으로 리드미컬하고 적절하게 연결되도록 설계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 작품은 디즈니의 고전적인 방식인 풀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작품과 구별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작품이다. 풀 애니메이션이 쉼 없이 움직이는 동작의 연속이라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은 적절히 절제되고 통제된 움직임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절제된 리미티드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쇼트 화면 한 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아지 꼬리의 흔드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유머와 리듬감 같은 것들은 이 작품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매력 포인트다.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그 유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대사 없는 이 영화의 화면에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흔히 애니메이션에서 타이밍이라 하면 보통 실제적인 움직임의 자연스러움에 얼마나 근접하는가를 떠 올리겠지만, 실제로 애니메이션에서의 타이밍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다. 우리는 이 작품이 관객들의 감정적 타이밍을 얼마나 자유롭게 이끌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이 절제된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화면의 미장센에 집중하게 한다. 화려하고 우아한 애니메이션 위주로 감정을 전달하기 보다는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화면의 미장센이 건네는 정서적 교감의 힘이 크다. 사라 바론의 그래픽 노블 원작의 느낌을 가져왔으나, 그 장점은 살리고 애니메이션화 하는데 있어 불편한 요소는 과감하게 변화를 줬다. 여기서 이 작품의 디자인적인 감각과 능력이 발휘된다.

원작보다는 디자인적으로 정리된 캐릭터들이지만, 원작의 단순함과 소박함은 그대로 살렸다. 단순한 선으로 구성된 캐릭터들은 그 단순 명료함으로 인해서 캐릭터의 감정을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이런 단순한 카툰형 캐릭터의 경우 자칫 과장되거나 밋밋해질 우려가 있는데,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그 두 가지 위험 사이를 지혜롭게 헤쳐나가며 관객들의 깊은 공감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연기를 하고 있다,

4. 캐릭터의 단순함과 달리 배경은 원작보다 복잡하고 섬세하며 사실적인 스타일로 디자인 되었다. 뉴욕의 모습을 거의 실사에 가깝게 묘사했으며, 그 방식은 유화 혹은 파스텔 톤 스타일의 페인팅 방식이 아니라 펜 터치 라인을 고스란히 살린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배경들은 작품에서 환상적이거나 동화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다소 건조하고 사실적인 현재성을 부여한다. 사실적 배경을 묘사한 펜 선들의 복잡함으로 인해 간결한 캐릭터 디자인은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되었고, 의인화된 동물로 묘사된 뉴요커들을 사실적 배경에 갇힌 존재로 보이게 한다. 그렇게 그 도시에 사는 인물들은 운명에 갇혀 사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람과 도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5. 최근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하면 사람이 그리는 방식이 아닌 CG(흔히 3D라고 하는) 제작이 일반적 추세다. 인건비 절감과 함께 보다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메이저 제작사들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철저하게 아날로그적 감성과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배경의 펜 선들도 그렇지만, 캐릭터를 묘사해낸 라인들도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물론 요즈음에야 종이 위에 그리지 않고, 태블릿 모니터를 이용해 디지털 방식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러니 아날로그적이라 함은 단순히 재료의 문제가 아니고 감성의 문제다.

주인공인 로봇이 클로즈업일 때를 보자. 일반적인 경우라면 둥근 눈을 깔끔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최대한 원형 툴을 이용해 원이나 타원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부러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원과 타원은 직접 손으로 그린 티를 내며 자연스럽게 삐뚤거리거나 찌그러져 있다. 이런 요소들이 이 작품에 소박함과 인간다운 따스함을 부여한다.

6. 이 아날로그적 감성의 애니메이션 작품에 온기를 불어넣는 건 무엇보다 칼라 디자인이다. 전체적인 색감을 원색이나 두드러지게 화려한 색이 아닌,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도 따스함을 간직한 난색 계통의 중간 톤 칼라들로 균형 잡힌 화면을 디자인했다. 배경과 캐릭터는 어느 순간 어디에서 만나도 이질적이지 않고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전체적인 색조는 이 작품이 간직한 온기와 함께 은은하고 담담하면서, 쌉싸름하지만 부드러운 느낌과도 잘 어우러진다. 마치 도시인에게 어울릴만한 아메리카노 한 잔처럼.

7. 이 영화는 사운드가 있는 작품이지만 대사는 전혀 없다. 들리는 건 생활 속 소음이거나 배경 음악이다. 옛날 무성 영화를 떠 오르게 한다. 무성 영화 시대의 전설적인 배우들은 유성 영화의 등장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었다. 영화 연기는 대사가 없더라도 충분히 표정과 동작만으로도 완성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으니, 소리가 들어간다면 영화 연기 고유의 예술성이 사라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 시대 배우들의 연기에는 볼 만한 무엇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등장 캐릭터들의 연기가 그런 면에서 유사점이 있다. 이 <로봇 드림>은 농도 깊은 감정 전달을 대사 없이 섬세하고 잘 계산된 표정과 동작만으로 이뤄낸다. 그런 만큼 관객은 이 영화의 화면 하나 하나에 온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8. 그러나 캐릭터의 연기만이 감정 전달의 모든 것은 아니다. 이런 미묘한 정서를 전달해야 하는 경우에서라면 이런 2D 캐릭터들의 한계는 드러난다. 그런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빛과 그림자 등을 이용한 화면의 미장센이다. 그림자를 이용한 캐릭터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것은 재패니메이션의 장인들이지만, 이 작품에서도 조명은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미묘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9.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오래 전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낯익은 영화들의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은 이 작품 곳곳에 고전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를 배치했는데,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롱 샷들은 어쩐지 자크 타티 영화의 느낌을 소환시키고, 몇 몇 장면들은 빅터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나 우디 앨런의 <맨해탄>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로봇의 꿈 속에 등장하는 꽃들이 춤추는 장면은 명백하게 디즈니 프로덕션이 1932년에 공개한 세계 최초의 테크닉 컬러 영화 <꽃과 나무>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베르헤르 감독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10. 이 영화를 끌어가는 강력한 힘은 음악이다. 카탈루냐 출신의 작곡가 알폰소 빌라롱가가 만든 재즈 풍의 음악들은 현대 뉴욕과 뉴요커들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경쾌한 리듬의 음악들은 자칫 우울할 수도 있을 이 영화가 비탄조로 빠지지 않게 지탱해 주면서, 따스한 화면 칼라의 톤과 함께 이 삭막하고 건조한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빌라롱가의 그 모든 아름다운 음악을 뒤로하고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며칠 동안 머리 속을 맴돌게 되는 음악은 역시 어스 윈드 & 파이어의 < September>다.

경쾌한 펑크 사운드와는 달리 노래 말은 마음 한 켠을 쓸쓸하게 한다. 하지만 삶이란 이런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상대방 때문에 받게 될 상처마저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상처가 두려우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도시의 외로운 인간들은 그 상처가 두려워 외로움을 감수하며 살지만, 이 작품의 주제가와도 같은 <September>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지나간 사랑의 상처를 붙잡은 채 슬퍼하지 말고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자고. 사랑이란 때로 용기다. 다가갈 때도 용기지만, 훌훌 털고 물러나는 것도 용기다.

누구나 사랑만 주고 받으며 살지 않는다. 상처도 주고 받으며 산다. 그런 상처에 시간은 때로 특효약이다. 도시의 분주한 삶도 상처가 아물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가끔씩 그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며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궂은 날씨에 찾아오는 신경통 같은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해서 치유 받기도 한다.

김연수는 그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나는 모든 사랑이나 관계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니 늘 현재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올바른 태도라고 믿는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에서 주인공 조제가 읽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한요한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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