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24년 작품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2018년 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2023년 작 <가여운 것들>과 비교하면, 좀 더 이전의 영화 스타일로 돌아간 듯싶다. 그러니까 란티모스 감독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각인시켰던 <송곳니><더 랍스터><킬링 디어>등의 스타일과 맥을 같이 한다. 시나리오 작업 역시도 초기 작품에서처럼 에프티미스 필리포와의 공동 작업으로 돌아왔다. 최근 공개되었던 이전 두 편의 영화가 바로크 시대(더 페이버릿)와 19세기 시대 말 상황(가여운 것들)을 배경으로 그로테스크한 화면을 디자인해서 보여줬다면, 이번 영화는 초기 영화들에서 보여줬던 모던함과 미니멀한 분위기를 다시 가져왔다. 기괴한 시각적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의 현실 세계로 돌아온 란티모스의 세계는, 그러나 초기 작품처럼 여전히 부조리한 세계다.

이전 작품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첫 옴니버스 작품이라는 것. 러닝 타임이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이 영화는 <R.M.F.의 죽음><R.M.F. 날다><R.M.F. 샌드위치를 먹다>라는 세 가지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에피소드는 R.M.F. 라는 인물로 서로 연결된 듯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딱히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 세 개의 독립된 이야기에 동일한 배우들이 각 각의 에피소드에서 다른 배역으로 바꿔가며 계속 등장한다는 점이 오히려 특별하다. 이런 점에서는 웨스 앤더슨 감독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했던 일련의 단편 영화들을 상기시킨다. 웨스 앤더슨의 4개의 단편 영화들은 로알드 달 원작의 기묘한 동화라는 공통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독립된 단편이 아니라 옴니버스로 묶인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어떤 카테고리로 서로를 묶을 수 있을까? 란티모스 감독은 제목에서 이 영화를 ‘친절’이라는 주제의 카테고리로 묶으면서, 그 세 가지 이야기를 연결 시키는 고리로 R.M.F. 라는 인물을 맥거핀처럼 사용하고 있다.

1. 친절

이 영화의 포스터 중 일부는 감독의 생각을 분명히 보여주는 듯 한데, 출연 배우들에게 가면을 씌운 모습을 포스터에 사용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친절’은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기 보다는 가면을 쓴 것처럼 무언가 감추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친절’은 개인이 사회에서 관계를 맺어나감에 있어 꼭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가르쳐왔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오랫동안 7대 미덕 중 하나로 여겨져 왔고, 7대 죄악에서 그 반대 개념은 ‘질투’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서 ‘친절’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는 모호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친절하다고 해야 할 지, 또는 불친절하다 해야 할 지 쉽게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지만, 때론 나의 친절이 상대방을 불편하게도 하고, 내가 베푼 친절이 오히려 칼이 되어 나의 뒤를 찌르는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친절이라는 덕목도 상품화했다. 자본주의에서 친절은 거래된다.

란티모스 감독의 이번 영화 속에서 친절은 상호 존중의 방식이 아닌 일방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강요되거나, 포장되거나, 배타적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 결과는 선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굴욕, 질투, 의심, 배제, 소외 등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제 친절은 미덕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일종의 요령이나 규칙 정도라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2. 가족 혹은 사랑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 혹은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로서의 ‘조직’은 란티모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송곳니><더 랍스터><킬링 디어>에서는 ‘가족’이라는 조직에 대해 집요한 의심과 질문을 던지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당연시 여겨왔던 가족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시도했었다. 그의 영화 속 가족은 우리의 관념 속에 자연스레 존재하는 순수함의 가족이 아니다. 거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는 최소 단위의 사회 조직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줄곧 가족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로서의 가부장제, 결혼제도 등에 균열을 내왔다. 가족 제도에 균열을 낸다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구조에 균열을 낸다는 의미와도 같다.

세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가족과 관련이 있다. <R.M.F.의 죽음>에서 로버트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안정적인 가정을 일군 듯 하지만, 그의 능력이란 고작 회사 고용주에게 친절(혹은 충성)을 보인 대가일 뿐이다. 고용주가 친절을 거둔다면 그가 일궈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흩어질 뿐이다. 본질적으로 로버트에게 가족이란 아내가 아니라 고용주와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로버트에게 고용주 부부는 부모와 다름 없다.

<R.M.F. 날다>에서는 경찰관 다니엘의 사랑하는 아내가 실종된다.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아내. 그러나 다니엘은 돌아온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헌신적인 친절(혹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원래의 사랑하던 아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인다.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현재의 사랑을 의심하며 진정한 사랑의 존재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것일까?

<R.M.F. 샌드위치를 먹다>에서 에밀리는 비밀스런 소수 종교의 공동체에 속해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녀는 전통적 제도의 가족(남편과 딸)을 버리고 이 공동체를 선택했다. 새로운 공동체는 교주 부부가 베푸는 친절(혹은 은혜)과 그에 대한 복종으로 유지되는 또 하나의 기이한 가족과 같다.

가족이란 단위가 시작되고 지탱되는 근본이 사랑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결국 가족 제도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통념을 의심하는 것이다. 란티모스의 영화가 균열을 내려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다시 말하면 사랑에 관한 이데올로기 이기도 하다. 첫 에피소드에서 고용주는 로버트에게 무한한 보상과 함께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 관계는 너무 일방적이어서 일종의 S&M 관계처럼 보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 첫 부분에 나오는 유리드믹스의 노래 <Sweet Dreams(Are Made of This)>의 노랫말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이는 누군가를 부리길 바라고/ 어떤 이는 누군가가 부려 주길 바라지/ 어떤 이는 누군가를 이용하길 바라고/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길 바라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남편을 향해 아내가 “죽도록 사랑해” 라고 말하지만, 다니엘은 “그럼 죽어” 라고 대답한다. 사랑은 끊임 없이 의심하고 목숨마저 걸어서 증명해야만 할 만큼 중요한 것일까? 첫 번 째 에피소드에서 그랬듯이 두 번 째, 세 번 째 에피소드에서도 사랑은 일방적이다. 베풀면서 의심하는 자와 끊임없이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순결한 충성심을 증명해야 하는 자의 관계.

사랑은 섹스와 떼놓을 수 없다. 이 영화 속 사랑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듯이 성관계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 전통적 가치에서의 성관계는 사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배타적 일대일 관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전통적 관계에도 균열을 낸다. 영화 속 인물들의 성적관계는 다자적 관계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로버트와 고용주 부부의 관계는 마치 threesome의 관계처럼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그 상징적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 <How Deep Is Your Love>의 노랫말 역시 의미 심장하다. (원곡은 비지스의 노래지만 영화에서는 출연 배우 마거릿 퀄리가 부른다)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정말 알고 싶어요/ 우리는 우리를 갈라 놓으려는/ 바보 같은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요/ 세상이 우리를 완전히 내버려 둔 후에야/ 우리는 서로에게 통할 수 있어요.

이런 자유분방함은 두 번째 에피소드의 부부관계에서도 이어지며, 심지어 세 번 째 에피소드에서의 교주와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간에는 섹스 조차 종교 의식처럼 공동의 집단적 관계로 엮여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친절이 거래되듯이 사랑과 섹스 역시 거래(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된다. 가족의 개념은 본래의 전통적 의미에서 점차 다양하게 변이되어 사용되고 확대 해석되면서 모호해지고 있다. 결국 가족의 의미도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와 이데올로기 속에 갇히게 된다.

3. 직장, 종교

가족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토대가 되는 조직이라면,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조직은 직장일 것이다. 직업은 생활 수단이고 자기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직장은 현대인에게 삶의 기반이면서 삶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직장은 가정보다 더 우선 순위에 있어 보인다. 직장은 한 개인이 맺는 관계이면서 가족이라는 단위가 맺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용주는 빈번하게 회사를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해서 노동자들에게 말하기를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과정을 통해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사랑과 헌신의 관계로 치환되면서, 관계의 본질은 뒤로 감춰지게 된다.

직장(혹은 기업)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물적으로 지배한다면,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종교다. 상호 보완적이면서 역할은 다르지만 기업과 종교는 서로 닮아있다. 지배하는 방식과 조직을 유지하는 방식에서도 서로 영향을 끼친다. 기업처럼 종교도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다. 일방적 관계는 배타성과 폐쇄성을 동반한다. 그 관계에 대한 거부의 대가는 일방적 배제와 그 뒤에 찾아오는 소외감이다. 자신이 집중해 왔던 집단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상처와 소외감도 더 깊다.

<킬링 디어>에서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인 원죄, 희생, 메시아 신앙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란티모스 감독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소재가 종교 공통체인 것뿐 아니라 세 에피소드 모두에는 성서의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들이 숨겨져 있다.

영화 속 세 개의 에피소드가 직장, 부부, 종교와의 관계라는 소재를 통해서 주목하려는 것은 결국 이타심 뒤에 감춰진 이기심이다. 다양한 미사어구로 포장되긴 하지만, 현대 사회는 타인의 이타심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사회다. 그 이기심을 숨기기 위해 현대인들은 친절이라는 가면을 쓰고 산다. 란티모스 감독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개념과 가치들에 균열을 내지만, 그것은 그 고유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한다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곱씹어 보게 된다.

초기 영화에서 보여줬던 날카로운 통찰력은 여전하고, 이번 작품에는 기발한 블랙 유머 코드까지 포함시켜서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즐길만한 요소들이 많다. 하지만 부조리하게 전개되는 내용이 주는 낯섦이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을 안하고 바로 OTT로 푼 배급사의 선택이 아쉽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읽어 낼만한 요소들이 많은,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으로 보고 말할 거리가 풍부한, 흥미로운 영화라고 추천한다.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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