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구, <만당문채록>(한국국학학회, 1970; 민속원 복간, 1992)

이혜구(1909.1.10 ~ 2010.1.30.)는 국악 연구의 선구자이다. 1927년 경성방송국(JODK)이 개국했고, 이혜구는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경성방송국의 여러 프로그램을 담당했는데, 조선악(朝鮮樂 )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오래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 국악의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만당속문채록>, 1985; 민속원 복간, 2003)

이혜구는 『만당 문채록』(서울대학교 출판부, 1970)을 내놓았다. 이혜구의 호가 만당(晩堂)이고, 문채(文債)는 ‘글빚’이 된다. 이혜구는 강의하고 논문을 써가면서, 신문과 잡지 등에서 국악과 관련 원고 청탁받았다. 대학교수라는 주업에 충실하면서, 그 사이에 글을 쓰는 게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때론 기한을 넘기고 독촉받게 되었는데, 이 때 심정이 꼭 ‘빚에 쫓기는 빚쟁이’이 같았다고 한다. 그는 빚 갚듯 글을 썼고, 그런 글이 모여서 엮어진 책이 『만당 문채록』이다. 그 이후 이런 글들이 또 모여서 『만당 속문채록』(민속원, 2003)도 내놓았다.

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나는 평생 글빚에 시달린다. 빚쟁이에게 독촉받은 사람을 빚을 갚으면 해방된다. 그러나 수중(手中)의 돈은 사라지고 남는 게 없다. 글빚은 그렇지 않다. 글빚을 갚는다는 건, 또 하나의 글을 남기는 것과 같다. 내가 평론가로 데뷔한 게 1985년이니, 40년 동안 글빚을 갚아가는 셈이다.

해마다 글을 쓰고, 연말에 내 글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한해의 끝자리에선 국악계 10대 뉴스를 뽑게 된다. 열 개의 중요한 이슈를 뿌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너무도 보이는 것만 본 것 같은 반성이 생긴다. 늘 걸리는 공연이 남게 마련이다.

서울 중심으로 중앙공연을 다루기에 지역의 좋은 공연이 소외된다. 이슈 중심의 대형공연이 주가 되기에, 너무 시류를 의식해서 정리한 것이 아닌가 싶어 반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반성은 새해를 맞으면서 거의 잊게 된다.

노올량_섬 아리랑

금다래꿍_잔치마당

상가에서의 하룻밤_예술숲

2025년이 되었어도, 더욱 기억되는 2024년의 공연

2025년이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설 명절도 넘겼다. 그런데 예년과 다르게, 나는 글빚을 갚지 못했다는 가위눌림이 계속되고 있다. 내가 지난해 글빚을 청산하지 못한 세 단체는 음악그룹 노올량, 예술숲, 잔치마당이다.

㈜ 플레이온컴퍼니(정세화 대표)와 손잡고 있는 음악공장 ‘노올량’은 민소윤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김면지 대표가 이끄는 문화예술 콘텐츠기업 ㈜예술숲은 여러 작곡가를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고, 인천을 지역 기반으로 해서 전국으로 활동하고 있는 ‘앙상블 더류’가 소속되어 있다. 서광일 대표가 이끄는 사회적기업 ‘잔치마당’에는 잔치마당연희단이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지난해에도 큰 성과를 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그런 활동은 그 전부터 계속되어졌다. 그러나 플레이온컴퍼니와 잔치마당은 매년 10대 뉴스에 들어가지 못했다. 예술숲이 기획한 공연은 당시에도 큰 주목받았고 매년 성과가 있었다. 그래서 10대 뉴스 안에 꼭 들어갔다. 그러나 매년 예술숲이란 단체만을 주목하는 것 같아서, 지난해에는 아예 10대 뉴스에서 일단 제외했다.

이 세 단체의 공연은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소확행(小確幸)이다. 이들의 공연에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담겨있다. 이들의 공연을 접하게 되면, 관객들도 행복해진다.

노올량, 서오릉공연

2024년 음악공장 노올량은 <음악 속 왕릉이야기>를 펼쳤다. 서오릉 등에서 공연했다. 왕릉에 담긴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편하고 즐길 수 있는 노래를 관람객이 함께 감상하는 프로젝트였다.

노올량, 섬 아리랑_512호_상중태도

음악공장 노올량의 ‘생활 속 노래’를 지향한다. 그간 ‘명절에 듣기 좋은 국악’을 만들어냈고, 여러 형태의 아리랑을 만들었다. 아리랑이란 게 ‘과거 옛 노래’가 아니라 ‘지금의 내 노래’란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전통노래를 잘 활용해서, 그걸 이 시대의 노래로 만들고자 하는 ‘사고의 전환’에서 가장 앞서간다. 이런 결과물의 하나가 ‘나를 위한 아리랑’이다. 노올량의 노래는 처음에 들었을 때 확 다가오는 노래는 아니다. 가사가 많고 생각이 담겨 있기에 처음에는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노래를 곱씹을수록 그 안에 담겨있는 가치가 느껴진다.

동그랑땡_잔치마당

동동마을을 구해주세요_잔치마당

사회적기업 잔치마당(단장 서광일)엔 잔치마당 연희단이 있다. ‘사회적’ 기업인 잔치마당은 줄곧 ‘가족적’ 공연에 선구자가 되어주었다. 지난 2024년엔 국악극의 세 번째 작품인 <동그랑땡>을 공연했다. 2017년에 제작한 <금다래꿍>은 서도민요 ‘금다랭꿍’이 소재가 되었다. 잔치마당은 <금다래꿍> 동화책도 펴냈고, 여러 초등학교에서 공연했다. 이런 자신을 바탕으로 해서 2020년엔 분리배출 4원칙을 주제로 제작한 환경국악극 <동동마을을 구해주세요>을 제작했다.

‘가족국악극’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단체가 잔치마당이다. 창작연희극 <동그랑땡>은 외모로 쉽게 누군가를 평가하여 편견을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서 외모의 다름이 각자의 장점이 되어 어려움을 헤쳐가는 이야기다. 열두발놀이, 버나놀이, 학춤, 바라춤에다가 마술까지 겹쳐지면서, 미취학 아동까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공연으로 정착했다.

동그랑땡_전통연희단 잔치마당

<동그랑땡>은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전해지는 전래민요이다, 이 민요의 내용에 착안한 가족극 <동그랑땡>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동이, 그랑이, 땡이 삼총사가 학마을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연희극으로 만들어냈다. 동물과 인간의 특성을 서로 잘 연결지었다는 평도 받았다.

이 공연을 긍정적으로 높게 평가하자면, 여성 3인 삼총사가 만들어낸 것이다. 여성 3인과 연관해서 젠더적인 의미도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연은 잔치마당과 오래 함게 한 김호석이 빠지면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이 공연에서 진정 ‘아빠의 마음’이 된다. 아빠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아빠가 나를 위해서 연기를 하는 모습에 아이가 감동받는 것처럼, <동그랑땡>에서의 김호석이 그렇다. 때론 손가락이 오그라들게도 되지만, 무대에서 몸을 사라지 않는 그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선물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노올량 원원(元&願) vs. 잔치마당 동동(同&動) vs. 예술숲 지지(知&智)

노올량의 공연은 삶(生)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공연의 키워드를 원(元)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삶에서 무엇을 으뜸(元)으로 두어야 하는가. 그들은 그걸 노래로 본다.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연결하고자 하는데, 그것의 매개가 되는 건 민소윤이 작곡한 노래다. 이런 노래는 삶의 원동력, 삶을 활발하게 만들어준다. 노래를 매개로 해서 모든 사람의 바람(願)을 담아낸다.

잔치마당의 공연의 출발은 어린이(童)이다. 이런 어린이를 중심에 두면서 모두가 하나(同)가 되길 지향한다. 그리고 이런 하나됨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대한민국 연희가 갖는 역동적인 움직임(動)이다.

금다래꿍_잔치마당

그렇다면 예술숲 공연 키워드는 무엇일까. 공연 형태가 다양해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콘텐츠에[는 모두 학(學)적인 기반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시류(時流)와는 무관하고, 그들만의 확실한 시각(視覺)이 있다. 예술숲은 확실히 지(知)를 알려주면서 지(智)을 지향하고 있다. 공연의 형태가 결과물은 모두 다 다르지만, 그 밑바탕에 자리한 것은 인문학이다. ‘인문적 힐링’이라고 할까. 예술숲 공연에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지혜로 향하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상가에서의 하룻밤_예술숲

지난해에 또 공연해서 관객들을 눈물짓게 만든 <상가에서의 하룻밤>을 비롯해서 이런 공연이 참 많다.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_나태주 시인과 함께_예술숲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_예술숲

예술숲은 그간 나태주 시인과 함께 하는 ’시와 음악이 있는 콘서트’를 기획 제작해서 큰 성과를 냈다. 풀꽃 시인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와 관련한 음악을 듣는 것이다. 박경훈이 작곡한 곡은 정서적으로 품격있게 느껴진다. <사랑에 답하다> 등을 함게 하면, 시도 좋지만 노래와 음악과 만나서 얼마나 그런 정서가 승화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상가에서의 하룻밤_예술숲

사유의 시간, 공존의 시간, 위로의 시간_예술숲

노올량의 공연을 보면서 ‘노래의 가치’를 생각하고, 잔치마당의 공연을 보면서 ‘가족적 동료애’가 느껴진다면, 예술숲의 공연을 통해서는 ‘진정한 위로’가 전달된다. 버겁고 힘겨운 삶에서 시와 노래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고, 특히나 대한민국처럼 변수가 많은 상황 속에서, 시민이 시민에게 서로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응원하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해주고 싶다.

소확행을 전제로 한 이들의 세 단체의 공연은 ‘노올량은 가창(歌唱) 지향’, ‘잔치마당은 가족(家族) 지향’, 예술숲은 가치(價値) 지향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2024년 우리는 노올량과 함께 하는 사유의 시간, 잔치마당과 함게 하는 공존의 시간, 예술숲과 함께 하는 위로의 시간을 경험했다. 이 세 단체의 공연에는 ‘국악이 좋다’는 말이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공연을 지켜보면서 ‘국악이 좋다’는 걸 많은 시민이 공감한다. 노올량, 잔치마당, 예술숲은 확실히 ‘국악만이 해낼 수 있는 공연’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다. 2025년, 이들 세 단체는 우리에게 이런 가치를 더 넓고 깊게 전달해 주리라.

윤중강 음악평론가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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