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px-Painting_by_Forough_Farrokhzad

아, 내가 가을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내 눈 속에 시인이 있어 하늘의 시를 읊으리라

심장에서는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리라

그 불꽃 속에 고통을 숨기고

내노래는

바람 소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지친 마음에 고통의 향기를 뿌리리라

내 얼굴 앞에는

고통스런 표정의 젊은 겨울이

머리 뒤에는 갑작스런 사랑의 혼란한 여름이

내가슴은

근심과 고통과 의혹이 사는 곳

아, 내가 가을이라면

_ 포루그 파로흐자드, '슬픈 기도'  中에서

1.

오랜만에 찾아온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2023년 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제법 낭만적인 제목으로 국내 개봉을 했다. 원 제목 <Kuolleet lehdet>은 ‘낙엽’이란 뜻이니, 국내 개봉 제목은 요즘 트렌드와 달리 꽤 고전적인 제목을 붙인 것이다.

국내 개봉 제목에 비해서 원래 제목의 느낌은 좀 더 건조하다. 그리고 영화는 낙엽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큼이나 쓸쓸하다. 그 쓸쓸하고 황량한 정서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영화의 정체성이다. 영화는 노동자 계급의 사랑을 다룬다. 사랑을 하는 두 주인공들의 신분이 노동자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이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며 애쓰는 와중에도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쌓아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의미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는 차갑고 건조한 시선과 시니컬한 블랙 유머로 핀란드의 암울한 현재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의 일관된 관심사는 이 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이다. 마치 풍경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지독한 현실에 내던져진 존재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들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그런 존재들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시니컬하지만, 이 거지 같은 세상을 ‘살아내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담겨있다..

우리스마키 감독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보다 냉소적이었고, 카메라에 포착된 인물들의 삶은 지독히 암울하게 그려졌었다. 출구 없이 막막하고 내밀어도 잡아줄 손이 없어 보이는 세상이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바라본 세상이었다. 그런데 나이 탓일까? 언젠가부터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9년 작 <성냥공장 소녀>에서의 주인공은 철저히 고통스럽고 외로운 결말을 맞았지만, 2002년 작 <과거가 없는 남자>와 2006년 작 <황혼의 빛>에서는 나락에 떨어진 주인공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길이 있었다. 이번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이 영화는 노동자 계급의 영화다. 그들의 계급성을 정치적으로 직접 다루진 않으나 그들의 삶을 담는다. 삶을 담는다는 의미에는 생존의 방식뿐 아니라 문화와 언어 생활, 그리고 연애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일상의 모습은 노동자 계급의 현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안사와 홀라파는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들에게 근사한 직업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안사는 대형 마트나 술집의 식당, 혹은 공장에서 일한다. 홀라파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여기 저기 공사판을 옮겨 다니면서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안사는 마트에서 일할 때 유통 기한이 지난 식품을 몰래 숨겨 갖고 나와 끼니를 해결해야 할 만큼 빈궁하다. 마트에서 해고를 당하고 나서는 몇 일 째 굶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녀에겐 지갑에 동전 몇 푼 밖에 없다. 같은 노동 계급이어도 여성 노동자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2.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는 배우들의 절제된 움직임과 표정 연기만큼이나 대사의 전체적 분량이 적다. 그런 요소들이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를 흔히 미니멀리즘 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은 긴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다. 당연히 깊은 속내를 나누는 진지한 대화도 없고 꼭 필요한 일상의 대사만을 나눈다. 이런 요소들이 영화를 무뚝뚝한 느낌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이런 무뚝뚝해 보이고 투박한 언어가 고단한 삶에 지친 노동 계급의 소외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런 어눌한 표정과 언어 뒤에 숨은 그들의 진심을. 그들 나름의 살아가며 익숙해진 방식임을.

그대신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감독이 선택한 것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들이다. 그 상황의 인물 감정에 딱 맞는 OST의 선택은 감탄을 자아내는데,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전 영화에서도 OST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재능을 보여줬었다. 적절한 노랫말이 담긴 노래는 주인공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속내를 드러내고 미니멀한 대사의 빈 공간을 채운다.

선택된 노래들은 카우리스마키 감독답게 과거지향적이고 아날로그적이다. 영화 속 상황은 2022년 현재임에도 노래들은 과거의 감성이다. 핀란드 출신이거나 핀란드에서 활동했던 가수들에 의해 불려지는 대부분의 노래는 1950년대에서 1960년 대 즈음에 유행했던 포크, 록 앤 롤, 재즈, 맘보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었다.

모든 사운드 트랙들이 좋았지만, 가장 반갑고 놀라웠던 것은 영화 초반에 안사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다. 영화에서 사용된 ‘Takedan kehtolaulu(타케다의 자장가)’는 1993년 일본계 핀란드 가수 토시타케 시노하라가 리메이크한 버전이다. 

원곡은 1971년 일본의 포크 밴드 아카이 토리(赤い鳥)가 '竹田の子守唄(다케다의 자장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서 크게 히트했던 노래인데, 본래는 일본의 교토 지역에 존재했던 천민 집단 '히사베츠부라쿠(被差別部落)'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요였다. 천민 집단이었던 부락민들은 생계를 위해 어린 여자 아이들을 부잣집에 보내서 갓난 아기들을 돌보는 노동을 시켰다. 이 노래는 부모와 떨어져서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의 애환을 담은 노래다. 이 곡이 영화의 첫 트랙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주인공 안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울지 미리 짐작해 보게 된다.

라디오를 듣는 안사

3.

노동 계급에겐 문화 생활도 사치다. 안사에게 문화 생활이란 집에서 라디오를 청취하는 게 고작이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보도가 흘러나온다. 그 상황을 통해서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주인공이 속한 삶의 현실성을 부각시킨다. 어딘가에서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위험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안전한가? 몇 일 째 굶고 있는 나의 현실은 안전한가? 라고 질문한다. 이런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정치적 질문을 던졌던 영화 두 편이 생각난다.

장 뤽 고다르_ <미치광이 피에로>

장 뤽 고다르는 1965년 작 <미치광이 피에로>(안사와 홀라파가 첫 데이트를 하던 극장 벽에 이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있다)에서 라디오 뉴스와 극장의 기록 영화등을 통해서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했다. 라디오 뉴스를 듣던 마리안느의 입을 통해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77)Cet obscur objet du désir Luis Bunuel(루이스 부뉴엘))초현실주의 영화

루이스 부뉴엘도 1977년 작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극중 스페인의 정치적 현실을 표현했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부뉴엘 감독은 당시 프랑코 총통 시기 스페인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반복해서 일깨워준다. 하지만 주인공 페르난도는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관심이 있을 뿐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 일에는 무관심했다.

데드 돈 다이 (2019)The Dead Don't Die

홀라파의 여가 생활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에겐 문화 생활이랄 게 없다. 술을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다. 그런 두 남녀(그리 젊은 나이가 아닌)가 만나서 연애를 시작한다. 먹고 사는 일에 치이다 보니 연애를 해 본적도, 문화 생활도 누려본 적 없던 그들은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다. 결국 선택한 것은 영화 관람. 

두 사람이 함께 본 영화는 <데드 돈 다이>, 짐 자무쉬 감독의 2019년 작품이다. B급 정서로 만들어진 좀비물이지만 잔혹함 보다는 정치적 코드가 담긴 썰렁한 블랙 코미디물이다. 누구도 예상 못 할 황당한 전개로 장르를 넘나드는 개성 넘친 영화다. 영화 속 영화 <데드 돈 다이>의 장면은 공동묘지 시퀀스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미 죽은 존재들,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인 시체들의 그 무표정함은 카우리스마키 영화가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또 얼마나 다른가? <데드 돈 다이>의 등장인물 밥은 그 장면에서 이런 대사를 했다. 

“좀비들, 물질주의에 빠진 인간들의 잔해.”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 중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이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한 사람은 로베르 브레송의 <한 시골 사제의 일기>와 닮았다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4.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찾아온 영화 <낙엽은 사랑을 타고>에서도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여전히 35mm 카메라 촬영을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아날로그 필름의 감성이 녹아있다. 요즘 영화들에서 익숙한 화면 입자의 선명함이 그의 영화에는 없다. 대신 어딘가 바랜 듯 느껴지는 거친 입자의 색감은 마치 1980년 대 이전의 영화들을 보는 듯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색감은 곧 주인공들의 남루한 현실을 반영한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카메라 워킹은 화려하지 않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느슨하게 절제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의 미장센을 과소 평가 하기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루함이 느껴지는 무채색에 가까운 색감 속에서도 각 각의 색채들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화면의 분할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성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영화 제작 방식을 고집하는 만큼이나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지나간 영화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영화 곳곳에서 드러낸다. 두 주인공의 만남과 헤어짐에 있어서 중요한 장소인 극장은 최신 영화가 아닌, 흘러간 영화들을 상영하는 곳이다. 벽에는 반가운 옛날 영화들의 포스터들로 가득해서 시네필들에게는 각별한 즐거움을 준다. 안사와 홀라파가 첫 데이트에서 영화를 보고 헤어질 때 두 사람 뒤에 붙어있던 포스터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45년 작 <밀회>다. 두 사람이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헤어지는 장면이지만, 그 포스터는 두 사람에게 곧 닥칠 불안한 운명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바치는 오마주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황혼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특히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가져온 엔딩 쇼트는 명백히 1936년 작 <모던 타임즈>에서 가져 온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우여곡절을 겪어도 엔딩에서 만큼은 낙관적인 미래를 암시하며 끝낸다. 그 중에서도 <모던 타임즈>의 엔딩 쇼트가 가장 아름답고 따뜻하다. 아마도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안사와 홀라파에게 아름다운 엔딩 쇼트를 선물하고 싶었나 보다.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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