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첫 질문은 ‘실체(實體)’에 관한 것이다.

‘나’란 존재는 무엇인지, 무엇을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에 관한 궁금증은 서양 철학의 오랜 관심사 중 하나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실체에 대한 질문이었고,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실재에 관한 탐구였다.

플라톤은 현실에서의 인간은 그림자고 진짜는 이데아에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현실 속 인간이야말로 실체 그 자체라고 봤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는 일정한 질료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형상이다.

기독교가 정신적으로 지배하던 중세시대엔 진리가 인간 내면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실체를 기독교의 하느님이라고 보았고, 눈으로 보고 있는 형상은 그 실체인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겼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던 데카르트는 그 하느님의 자리에 코기토(자아)를 놓았지만 여전히 실체의 방점은 내면에 있었다. 이른바 ‘신심이원론’이다.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존재하면서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실체에 대해 정의하는 ‘실체이원론’을 주장했다. 이 또한 방점은 여전히 내면에 있었다.

인간의 실체에 대한 탐구는 오랜 시간 예술과 문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신체강탈과 관련된 수 많은 영화들이 인간 실체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로봇이나 인공지능과 관련된 SF 영화들에서도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워쇼스키 형제(이제는 남매다)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 자아의 실체와 그를 둘러싼 세계의 실재에 관한 문제까지 그 질문을 확장했다.

영화 <서브스턴스>_사진_(주)NEW 제공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여성 감독 중 한 명인 코랄리 파르쟈는 하드 고어물이라는 장르 속에 이 철학적 질문을 녹여낸다. 신체 절단과 선혈이 낭자한 스플래터 영화는 어쩌면 신체와 정신, 혹은 형상과 질료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해 보인다. 신체가 난도질 당해서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인가? 그렇게 난도질 되고 해체되어 죽은 시체의 형상 역시 ‘그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의미 없는 ‘껍데기’뿐인 것인가? 형상은 변해도 본질인 질료는 변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마르크스의 말처럼 형상이 질료인 정신을 규정하는 것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SVuNBndq0uM&t=2s

2.

서양 철학은 인간의 오감에 위계를 정했다. 시각과 청각은 다른 감각과 달리 지각 대상과 감각 기관 사이의 접촉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어떤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인식론적이고 도덕적이며 미학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와 상대적인 이유로 미각이나 촉각과 같은 신체 감각들은 훨씬 열등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정은 등급이 매겨진 개념의 쌍들을 일렬로 세워놓는다. 그것은 몸보다 마음을, 감각보다 이성을, 짐승보다 사람을, 자연보다 문화를 더 높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여성보다 남성을 우월한 위치에 배치시키며 여성성으로 명명된 것들 위에 남성성의 특징을 올려놓는다.” (캐롤린 코스마이어 <음식철학>중에서)

18세기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이 아닌 외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흄은 실체라는 개념을 의심하면서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실체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이 지적 감각적 경험을 통해 정신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원론대신 일원론으로 실체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마르크스 유물론은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를 설명하며 인간의 정신은 현실의 물적 토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의 세계보다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종교의 권위도 흐려지고, 뇌과학 등 인간의 정신 활동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면서, 그동안 과소 평가 되어왔던 육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달을 통한 여가 생활의 여유와 맞물려 더욱 확장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도 이제는 정신적인 요소보다 물질적인 요소를 낮은 위치에 놓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물질적 풍족함은 육체적 안락을 가져다 주고 그것이 성공한 삶으로 비춰지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상품적으로 강조했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나온다” 건강한 정신을 위해 모두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건강한 육체의 힘으로 이룩한 성과들은 추앙 받을 만한 것이 되었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가치는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

이 영화는 육체에 관한 이야기다. 물성 그 자체로서의 몸을 말하는 이야기고, 남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 소비되는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데미 무어를 엘리자베스 역으로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누구라도 데미 무어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가 받았던 성형 수술을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 수는 젊고 아름다운 몸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본주의의 꽃이 된다. 그녀의 내면이 어떤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자본은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고 소비자들도 보여지는 것에 반응한다. 그녀가 하는 일은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에어로빅 쇼를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의 진행자다. 시청자들은 그녀의 몸을 보고 소비하며 자신들도 그런 몸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그녀는 단순한 TV 쇼 진행자가 아니라 시청자들 욕망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건강한' 몸을 꿈꾼다지만 그들이 욕망하는 꿈은 어쩌면 ‘아름답고’ 건강한 몸일지 모르겠다. 전통적 의미의 건강함과 우리 시대의 건강함은 이미 그 의미가 달라 보인다. 오늘 날의 헬스 프로그램이나 뷰티 산업들은 ‘건강함’ 보다는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과 욕망을 매개로 한 산업은 아닐까 싶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강한 몸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육체란 과연 무엇인가? 근대 이전까지의 철학에서 정신적인 것은 성스러운 것, 육체적인 것은 죄와 연관되어서 열등하거나 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육체에 대해 경멸하도록 충고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영화 속에서 동일한 질료인 ‘나’는 젊은 ‘나’와 늙은 ‘나’ 사이에서 분열하고 갈등한다. 늙은 ‘나’는 자신을 혐오하다 젊은 ‘나’를 질투하게 되고, 젊은 ‘나’는 그런 늙은 ‘나’를 경멸하며 제거하고 싶어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젊은’ 여성이 어떻게 상업적으로 소비되고 폐기 처분되는 지를, 그리고 ‘늙은’ 여성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차별되고 배제되는 지를 보여준다. 화려한 과거의 스타였던 인물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찾아온 자신의 쇠락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불화하며 자기 내면에서 분열하는 장면은 1950년 개봉했던 빌리 와일더 감독의 영화 <선셋 대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까지만 해도 나이 듦은 연륜과 지혜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노인은 사회적으로 충분히 존중 받을 만한 존재였지만 지금의 사회는 다르다. 늙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닌 무능함과 나약함의 상징이나 경멸과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자본주의에서 나약한 육체는 상품성이 없다. 노후한 몸은 더 이상 효용성이 없거나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대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3.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다.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전작 <리벤지> 후반부에서, 폭력 가해자 남성은 복수하러 나타난 주인공 젠의 목을 조르며 이렇게 말했었다.

"여자들은 이래서 문제야. 늘 싸움을 걸어. 여자들은 이렇게 항상 싸움을 건다니까."

<리벤지>에서는 고립된 공간인 황무지에서 세 명의 남성을 상대로 피의 복수를 했었지만, 파르쟈 감독은 <서브스턴스>에서 보다 강력해진 규모로 남성들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개인적인 일탈을 넘어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화려함 뒤에 숨은 할리우드의 ‘실체’는 어두운 욕망 그 자체다. 대중들은 욕망할 대상을 찾아 움직이고 자본은 그들에게 그 대상을 제공해 주면서 부를 축적한다. 그 대상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마치 광고 영상이나 뮤직 비디오의 영상처럼 화려하다. 색감은 도발적이고 카메라는 모험적이며 편집은 역동적이다. 거기에 음악마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마치 어떤 주체적 ‘눈’의 시선처럼 느껴지는데, 가끔씩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카메라의 렌즈 장면이 그런 의도를 잘 드러낸다고 보인다. 이런 점은 마이클 포웰 감독의 1960년 작 <피핑 탐>을 연상시킨다. 젊은 여성 스타 수의 모습을 찍는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바짝 붙어서 현란한 움직임으로 그녀의 몸을 훑는데, 그때의 카메라는 다분히 관음적이다. 반면에 롱 숏으로 대상을 잡을 때가 있다. 그럴 때의 카메라는 아주 느리거나 정지된 상태이고 시선은 마치 운명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시선처럼 관조적이 된다.

그렇게 잡아낸 할리우드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은 화려한 욕망을 쫓아다니지만, 그 욕망을 먹어 삼키는 것은 남성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여성의 몸과 욕망은 그 안에서 소비되고 해체되고 폐기된다. 하지만 그렇게 폐기 처분되고 마는 여성이라면 코랄리 파르쟈 감독 영화의 주인공답지 않다. 영화 후반부의 장면들은 전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유혈이 낭자하다. 여러 스플래터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후반부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육체와 정신의 문제를 하드 고어적 코드로 담아냈던 1980년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작품들일 것이다.

이제껏 적잖은 영화들에서 그리고 여러 매체들에서는 남성성에 의해 소비되고 차별 받는 여성성에 대해 끊임 없이 문제를 제기해왔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알아들을 때까지 말해줘야만 한다. 절대 잊지 못 할 만큼 강력하게!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태도는 그렇게 보인다. 영화의 후반부는 끝없이 내뿜는 핏줄기가 화면 가득 채우면서 관객들을 향해 집요하게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래도 아직 못 알아듣겠니?”라고. 감독은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심산으로 피비린내 나는 이 마지막 시퀀스를 준비한 듯 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이 시퀀스는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1976년 작 <캐리>의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모든 난장판이 끝나고 나면 마주하는 라스트 씬은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곱씹게 만든다. 이 영화는 어쩌면 환상과 욕망을 파는 미국 연예 매니지먼트 세계의 비정함과 허망함에 관한 쓸쓸한 보고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요한 애니메이션 감독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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