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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석의 행복론] 집(가정)과 행복
  • 양우석 아욱스부르크대학 철학박사, 한국외대 철학과
  • 승인 2023.09.2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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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과 현대

우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집에 살고 있다. 집과 인간의 관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을 다루는 학문을 지리학과 지세학(地勢學)이라고 하는데, 지리학은 물리적 공간적 관계에, 지세학은 인간의 정신적 관계에 주목한다.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주거 자체보다는 경제적 효율성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 집이 투자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웃지 못할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 곧 아파트이며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급속히 고향의 의미를 되돌아보려는 사회적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2) 집과 도시

정보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도구로 자연에 정보를 주입하여(informieren) 자연대상을 반자연적이고 개연적이지 않은 형태(자연에 인간의 의도를 개입시켜 고정시킨 결과)로 만들어 자연을 문화로 전환하는 존재로 정의된다. 이렇게 하여 생성된 문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친근한 결과물이 곧 집이다. 집이 모여 도시가 형성된다. 도시는 인간이 원시의 유랑을 끝내고 정착하면서 발생한 것으로서 문화와 문명의 토대를 이룬다. 이제 인간은 문명 속에 태어나지 더 이상 자연 속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시민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현대는 이러한 도시와 인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런데 도시의 중심 인자는 집이다.

3) 집과 고향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여 도시와 집이 형성되고, 그 곳에 얽혀 습관이 생겨나고 친숙하게 되어 고향이 형성된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옛 기억(고향)으로 해방을 원하며 현재는 이런 고향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대의 대표적 미디어철학자 빌렘 플루서(V. Flußer)는 고향이 꼭 본래적인 것으로서 그곳으로 돌아가야한 하는 곳이라는 무반성적이고 일반적인 견해에 반대한다. 그에게 고향이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새로이 설정될 수 있는 존재다. 고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주거 형태로 말미암아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집과 새로운 경험

플루서가 특히 놀라운 모델로 들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 이미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동식 주택이라는 미래의 주거 형태다. 물론 주거란 인간이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집은 전통적으로 한 군데에 정착한다. 집은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해 주는 폐쇄된 공간이다. 누구나 자신의 집에서 사생활이 보장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제 바햐흐로 시대가 바뀌었다. 집은 외부와 소통하려는 온갖 장치들을 내장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사방을 유리로 두르기도 하는 새로운 건축술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화케이블이나 텔레비전 안테나 등 외부와의 정보 소통 내지 교환을 건축에 반영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성에 갇혀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거하면서 동시에 외부를 경험하는 이동주택(Wohnwagen, 스마트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정보의 교환과 경험, 그리고 자신의 사적 공간을 지키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집이 가지는 유동적 형태를 말해준다.

 

5) 집의 의미와 구조

집은 보통 지붕, 벽, 창문, 문 등으로 이루어진다. 전통적으로 지붕은 높은 것(왕)과 낮은 것(신하)의 경계를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미래에는 강압적 지붕이 사라진다고 한다.(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벽은 안과 밖의 경계를 이루며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는 기능을 한다. 창문은 빛의 유입은 물론 외부의 정보와 감시, 관찰의 기능이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으나 이제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바깥 세상을 본다. 또한 창문을 통해 정보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빗장이나 창살은 보호의 기능이 있으나 때론 집 안을 감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케이블의 네트워크를 통해 집과 집은 물론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기도 한다. 수평적 소통을 포함하는 미래의 새로운 개념의 집의 형태가 예상되는 이유다. 이에 아파트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지한 집도 예상된다. 예컨대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감옥 판옵티콘(일망감시체계)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이상적인 건축 양식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속박하는 부정적 도구로 쓰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으로 평가된다.

플루서는 오늘날의 집이 존재의 조직과 생활의 성취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이동식 주택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집의 새로운 형태로 여겨진다.

 

6) 우리의 풍수지리와 집

우리의 전통 풍수지리설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뒤에 산이 받쳐주고 앞에는 물이 있으며전저후고(前低後高), 즉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전착후관(前搾後寬), 즉 앞은 좁고 뒤는 넓어야 한다는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따라 지붕, 정원, 건물이 배치된다. 우리의 전통 가옥에서 초가집의 지붕은 인간의 육신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한다. 중심이 높고 좌우가 낮아 하늘로 상승하는 구조로서 하늘에 순종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중국의 기와집은 지붕의 형태가 중심이 낮고 죄우가 높아 주변의 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면이 있다.)

현대의 대표적 주거 형태인 아파트는 좁은 국토에 많은 집을 짓기 위한 고육지책의 측면이 강하므로 단순히 비바람을 막아주는 공간이라는 도구적 의미도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는 아파트 전체의 터 모양과 주변 지형을 보고 풍수지리학적 접근을 하기도 하는데 건물의 배치나 방과 부엌, 거실 등의 실내 공간 배치를 통해 풍수지리적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현대의 변화된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 풍수지리설의 변형적 적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앞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소통, 인간과 집의 소통(풍수지리적 관점), 인간과 인간, 정보의 소통(플루서의 주장)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집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이러한 소통의 중심이 집이어야 하고, 집은 인간과 자연은 물론 정보를 중심으로 한 인문적 환경을 한데 품은 유기적 전체가 되어야 한다.

집은 건강한 자연과 문화,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운명인 고독과 고통, 죽음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풍수지리학의 요지라 할 수 있다.

 

 

7) 가정

가정(家庭)은 의식주 활동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라는 뜻이다. 가정은 먼저 마음의 안식처이자 공동 생활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보통 가정은 혈연, 비혈연 관계의 사회 집단을 뜻하며, 가족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진다.

가정은 의식주 활동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로서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사회 집단이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정서적 지지가 이루어지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공간을 뜻한다. 즉, 가정은 하나의 인적 집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가정은 혈연 관계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비혈연 관계로도 이루어질 수도 있는 사회 집단으로서, 공동체 구성원을 가족이라 한다. 주로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등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사회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조합의 가정이 생겼고 이를 반영하여 법체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주거를 기반으로 하며, 다른 사회집단처럼 개개의 가정도 각각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사회 전체가 개인이 중시되는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비혼의 길을 가면서도 자녀를 출산하여 가정을 만드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가정은 가족 및 타인과의 만남의 장소로서 함께 주거와 식사, 여가, 오락 등을 즐기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1인 가구가 증가 추세에 있고 이러한 사회변화로 인해 가정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하게 되는 등 가정의 의미에도 변화가 왔고, 인터넷의 발달로 사회 전체와 산업구조에도 변화가 왔으며, 변화된 산업구조는 1인 가구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었다.

8) 가브리엘 마르셀의 가정 개념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서양인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가정이 인간의 의식과 생활을 결정하는 근원적 조건이므로 과학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실체를 뜻하는 “문제”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 있는 주관적 존재인 “신비”라는 놀라운 주장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가정이 내 몸과 같아서 소유나 대상이 아닌 내 존재의 뿌리라 주장한다. 말하자면 가정은 내 몸의 신비와 같다. 내 몸은 나를 지탱해 주는 바탕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길이 없는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가정은 “화신”(육화?, l’incarnation), 즉 영혼과 육신의 실존적 결합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또한 가정은 내 몸의 체험적 확장으로서 가정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가정에서 조상-후손이라는 시간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깊은 성찰에 외로움은 없다"

 

끝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집과 가정의 관점에서 행복의 문제를 반추할 수 있다. 먼저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여러 가지 조건을 채웠을 때 우리가 그 안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된다. 요즘에는 외부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집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정은 인간의 가장 본연의 내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장 본래적인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본거지로서의 집과 가정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인간은 다시 또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계속-

 

양우석 아욱스부르크대학 철학박사, 한국외대 철학과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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