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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석의 현대행복론] 현대인과 행복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림 속의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땅을, 플라톤은 이상을 뜻하는 하늘을 뜻한다고 한다.

 

행복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좋을 때란 곧 기분이 좋다는 뜻이며 이를 보통 행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일상에서 행복이라는 말 혹은 그런 비슷한 의미의 말을 꽤나 자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의미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이라는 말의 뜻을 캐보면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행복(幸福)의 행(幸)은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뜻한다. 한자어 행복(幸福)이라는 말은 1. 다행(多幸), 행복(幸福), 좋은 운(運) 2. 요행(僥倖ㆍ徼幸), 뜻하지 않은 좋은 운(運) 3. 거동(擧動: 임금의 나들이) 4. 은총(恩寵), 베풀어 준 은혜(恩惠) 5. 오래 사는 일 6. 다행(多幸)히, 운좋게... 등을 뜻한다. 또 영어의 행복(happiness)은 만족(satisfection), 자족(contentment), 충만(fullfillment), 신남(glee) 등을 뜻한다.

그러나 행복의 행은 쉬운 말로 “다행하다”는 뜻인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설명하는 바가 없이 그냥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행” 자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기대는 것이 “만족과 기쁨”, “흐뭇함”의 의미다. 만족과 기쁨, 이로 인한 흐뭇함이 곧 ‘행’의 의미인 것이다. 행복이란 말은 따라서 의문투성이의 불완전한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원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는 문제는 일단 제쳐 두자. 그 다음으로 우리는 과연 어떤 때 행복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를 통해서 행복의 어원적 불분명성을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논의를 풀어가 보려고 한다.

 

우선 행복의 성립요건으로서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행복의 객관적 요소로서 심리학자 로스웰(C. Rothwell)과 인생 상담사 코언(H. Cohen)은 행복지수를 경제적 만족도, 삶의 만족도, 미래의 기대, 실업률, 자부심, 희망, 사랑 등등의 지표를 통해 수치화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국민총행복(GNH)을 산출할 때 건강, 시간활용, 생활수준, 공동체의식, 심리적 만족, 문화, 교육, 환경, 정치 등의 지수로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공리(公利)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이익(행복)이 조화를 이룬다고 보며,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초는 개인의 쾌락과 이익이라 하였다. 그 대표자인 영국의 벤담(J. Bentham)은 최대다수의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다. 그래서 쾌락과 고통을 계량화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보지만 개인마다 쾌락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밀(J. S. Mill)은 “행복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말하자면 행복과 만족을 구별한 것이다.

 

행복의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론 개진하는데, 공동체 안에서의 좋은 삶을 행복이라 보았다. 행위의 최고 목적은 최고선이지만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였다. 부, 명예, 쾌락 등등을 행복이라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같은 사람도 때와 장소, 상태 등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고 본다. 그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쾌락적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이라는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 쾌락적 삶은 동물적인 삶이고, 명예는 정치적 삶의 목적이며, 자족적이며 참된 행복은 여가를 필요로 하는 관조적 삶이라 하였다. 그러나 결국 여기서나 저기서나 행복이 정말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우선 행복이라는 인간 궁극의 문제에 대해서 시대별로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테네 학당_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 산치오가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문으로 27세인 1509~1510년에 바티칸 사도 궁전 내부의 방들 가운데서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고대의 대학자들을 한 자리에 모은 상상화다. 
서명의 방의 네 벽면은 각각 철학, 신학, 법, 예술을 주제로 벽화가 그려졌는데 이중에서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신화시대와 고대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신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접근이 가능한 상태다. 특히 그리스 고대 신화를 보면 거기에는 신들의 삶이 인간의 세계와 더불어 펼쳐진다. 신은 원래 죽지 않는다. 그러나 태어나기는 한다. 그들의 부모는 우주다. 신도 결혼을 하고 자녀도 낳는다. 따라서 신도 복수로 존재한다. 그들도 서로 사랑하고 미워한다. 만나고 헤어진다. 행복과 비애를 느낀다. 선행을 하기도 하고 악행을 하기도 하며 또 죄값을 치르기도 한다. 아니 뭐가 이래? 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니, 그러기에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올림포스 천국의 삶은 인간의 삶 못지 않게 행복과 불행을 오가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들은 금기를 어기는 죄를 짓고 그 죄값으로 불행을 떠안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운명에 관한 것이다. 신은 물론 신의 섭리를 받는 인간은 결국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걸머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 비극의 원천은 이러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그린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 안티고네 등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그 탄생 이전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걸머지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비극을 보고 사람들은 불편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바닥 모를 슬픔의 심연으로부터 자신의 운명과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낌으로써 오늘의 힘든 여정을 숙연히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대표적 실존주의철학자이자 삶의 철학자이기도 한 니체는 이러한 그리스의 비극이 최우의 대표적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에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아쉬워한다. 이 작가는 비극의 상영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티로스 합창단을 제거했던 것이다. 극의 내용 전달이 중요한 것이지 음악적 요소는 필수가 아니라고 단정한 결과다. 이런 상황을 철학적으로 잘 반영한 것이 소크라테스였으며, 그 이후 그리스는 물론 서양의 정신사는 이성과 정신, 논리주의, 합리주의 일색으로 흘러 결국 근대의 합리주의와 근대과학을 낳았고 결국 메마르고 벌거벗은 현대 기계문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간의 행복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너무나 잘 상상이 되는 것이다.

 

 

 중세

중세는 흔히 암흑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신이 인간의 자리에서 주권을 행사했으며 인간은 그저 신의 구원만을 애타게 갈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은 오롯이 신의 권한과 의도에 의해서만 담보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니체는 성직자들이 일반인 혹은 평신도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여 특권을 누리는 특권층이 되기 위해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라 자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평신도들은 정신적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질타한다. 이에 따른다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노에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정신적 노예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노예라는 것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성직자라는 압제자에게 내맡겨 버리고는 비굴하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자신의 일을, 자신의 행복을 자신이 아닌 타자에 일임해 버리는 무책임한 행태를 이르는 것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자신의 지상과업으로 여기고 또 그것을 행복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근대, 현대

근대에 들어서 획기적인 사건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확립한 것이다. 그 성과는 자연과학의 혁명으로 나타나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외쳤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기계공업을 일으켰고, 공장제 기계공업은 일자리의 창출과 대량 생산을 가져와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유럽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량생산의 결과 산출된 상품을 아프리카와 신대륙,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그곳에 강매하기에 이른다. 식민지는 급속히 유럽화되고 유럽의 생산기지 공장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인간의 삶과 행복의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은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인하여 생겨난 수많은 일자리를 차지하여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입이 있게 된 것은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잇는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소설 변신에 나타난 이 시대의 셀러리맨 그레고르 잠자의 삶은 말 그대로 벌레의 비참한 삶에 지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니체는 이런 인간을 인간말종이라 하였다. 인간은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비참하도록 불행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계의 한 축, 돈 버는 기계의 삶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기계의 세계에 그 일원으로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몸서리치도록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철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고독한 군중이라는 문제작에서 인간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전통지향형 인간, 둘째는 내면지향형 인간, 셋째는 타인지향형 인간이다. 과거 농경이나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근대 이전의 사람은 그 사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것을 수용하여 살아가고, 내면지향형 인간은 대체로 근대 이후 자신의 의식 세계에 침잠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으며, 타인지향형 인간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집착한다. 일종의 명예욕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내면적 문제보다는 타인이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형태다. 그것이 나의 행복이다. 행과 불행의 기준은 나의 내면적 만족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다. 물질적 풍요와 이로 인한 만족, 그것은 현대인의 행복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런 물질적 만족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선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 하는 문제를 유발한다. 물질적 만족은 끝이 없다. 상대적인 만족이 그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진다 하더라도 타인과의 비교로 인하여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래저래 현대인은 불완전한 의식을 소유한 채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겉도는 생활을 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할 것이다. 이런 것이 과연 행복일지는 각자 판단해볼 수 있다고 본다.

 

 

양우석

독일 아욱스부르크대학 철학박사, 한국외대 철학과, 대전대, 한남대 외래교수 등

 

 

 

*양우석 박사의 '현대행복론' 칼럼은 11회 시리즈로  매달 1회씩 연재 된다.

-1 만남과 행복

-2 경청과 행복

-3 미디어와 행복

-4 집과 행복

-5 반려동물과 행복

-6 글쓰기와 행복

-7 소비와 행복

-8 명예와 행복

-9 경제와 행복

-10 처세와 행복

-11 정원가꾸기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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