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서정민갑의 지금 좋은음악
[서정민갑의 요즘좋은음악] 류이치 사카모토의 '20220302'_12곡에 담긴 묵묵한 아름다움삶과 예술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울까. 멀리서 다가오거나 조심스럽게 울려 퍼진다....
  •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 승인 2023.03.19 19:06
  • 댓글 0
류이치 사카모트의 새음반_20220302

류이치 사카모토의 새로운 음반  _20220302 [12]

이 음반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음반이 될까. 암 투병 중 인데다 2017년에 발표한 정규 음반 [asyc] 이후 6년 만의 음반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투병 중에 공개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류이치 사카모토는 병색이 완연해 보인다. 중인두암에 이어 직장암 판정까지 받았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류이치 사카모토는 피아노 앞에 앉았고 계속 곡을 썼다. 곡을 만든 날짜를 제목으로 삼은 음반에는 그 중 12곡이 담겨있다. 2021년 3월 10일부터 2022년 3월 4일까지의 기록인 셈이다.

피아노와 신시사이저만을 사용한 곡들은 대개 앰비언트나 뉴에이지 음악에 가까워 고요하다. 소리는 멀리서 다가오거나 조심스럽게 울려 퍼진다. 악기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매순간 배음과 침묵을 동반하면서 순간마다 깊은 아우라를 불어넣는다. 이쯤 되면 이 음반에 운명적인 서사를 부여해야 할 것 같다. 죽음을 앞둔 거장의 유작 같은 음반이라거나, 인생에 대한 통찰이 알알이 배어 있는 음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처럼 들리는 음악인 탓이다.

 

삶과 음악, 삶과 예술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울까. 삶은 좀처럼 숨겨지지 않는 것이어서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진정성 있고 감동적인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면 예술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무수히 많이 보았다. 그리고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내는 세계이지 자신의 분신만은 아니다.

또한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반에 담은 묵묵한 아름다움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만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일 리 만무하다. 깨달음은 나이와 상황과 무관하게 찾아오기도 한다. 이미 이렇게 생각하고 느낀 날이 무수하게 많았을 것이다. 다만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두 개의 암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자신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상상해보게 된다. 아직 다 불태우지 못한 열정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고, 지우지 못한 미련과 회한으로 눈물짓는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도 있다.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가며 디스코그래피를 더하는 일 역시 어색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음반에 담은 곡마다의 표정과 기운은 지금 자신의 평화로운 마음일수도 있고, 언젠가 도달할 영원의 표상일수도 있다. 미니멀한 연주로 채운 곡들은 좀처럼 들뜨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담백한 멜로디가 느리게 이어지고 여백은 허허롭다. 자유로우면서 절제한 소리들은 관조와 사색, 기도와 평화로 기운다. 명상음악으로 활용해도 충분할 정도다. 이것이 류이치 사카모토가 발견해낸 깨달음을 음악으로 표현해낸 것이라면 음악이 얼마나 철학적일 수 있는지, 얼마나 경건하고 고독하며 치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충분하다.

 

곡들은 피아노 연주나 신시사이저 연주를 앞세우면서 서로 다른 선율과 사운드 스케이프를 들려주는데, 어떤 곡에서든 침잠한다. 어떤 곡은 애잔하고 어떤 곡은 고즈넉하지만 어느 곡에서도 감정이 소진되지 않고, 열정이 산화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삶이고, 통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세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투적인 과장이며 신화다. 그러나 분명 세계의 일부이며 실체다. 현실에서건 현실 밖에서건 세계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처럼 존재하기도 해서, 우리는 이따금 그 순간을 목격하고 조우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바로 그 순간의 세계와 존재, 운동과 소멸을 포착해냄으로써 끝까지 음악가의 소명에 충실하다.

그러나 이 음악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들을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깊고 의미 있는 음악이 있는데 쉽고 가벼운 음악만 찾아듣는다고 비판한들 다들 자신의 지성과 감각을 확신하는 시대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럼에도 음악은 계속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의 희미한 별빛처럼, 일 년에 한 번 꽃을 피우는 꽃나무처럼.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themove99@daum.net

<저작권자 © 월간 더무브 THE MOVE,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