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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허명현의 감성회로찾기] 당신의 라흐마니노프는?<디스커버: 라흐마니노프 _알렉산더 말로페예프> 콘서트
  •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2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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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어쩌면 라흐마니노프의 계절인가보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Alexander Malofeev)가 다시 라흐마니노프로 돌아왔다. 지난 독주회 때 피아니스트 본인의 아이돌이기도 한 라흐마니노프를 선보이며, 슈퍼 피아니스트임을 증명했다. 이번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과 3번으로 서초동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라흐마니노프는 계절과 참 잘 어울렸는데, 장윤성 지휘자는 라흐마니노프가 가진 거대한 스케일과, 또 곡이 가진 선율을 관객들이 잊지 않도록 강렬하게 표현했다. 아주 당도가 높고 짙은 라흐마니노프였다. 황페하고 어딘가 깊은 적막감이 느껴지는 라흐마니노프와는 반대 지점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는 어떤 것인가. 표현하긴 어렵지만, 황폐하고 깊은 적막감이 나타나는 라흐마니노프? 뜨겁고 화려한게 아니라 더 깊은 러시아는 적막과 황폐함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러시안들의 것이 아니어도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황폐함도 라흐마니노프 작품과 참 잘 어울린다. 그렇게 연주를 했던 건 일단 바이센베르크가 떠오르고. 리히테르와는 다른 접근이지만 아쉬케나지도 그만의 황폐함이 있었다.

 

가끔 한국인들을 띄워주려는 멘트로 ‘한국인이 한의 정서가 있는 민족이라 러시아의 심연을 조금 더 잘 이해한다’는 말이 있다. 이 소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러시아 음악들이 고유의 그런 정서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들만이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 이제는 들어주기 어려운 가브릴로프의 라흐마니노프를 듣다가도 불쑥불쑥 그런 정서가 튀어나와서 놀랐다. 이런 정서는 취하기도 어렵지만 버린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구나.

사실 이날 말로페예프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굉장히 멋지면서도, 자신의 표현이 확실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의외로 좋은 공연이 나오기가 어렵다. 일단 곡 사이즈 때문에 작품을 물리적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정신없이 흘러가다 보면 도처에 산재한 아름다움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버거운 연주를 듣다보면 이 장대한 패시지가 왜 의무적으로만 지나가야만 하는가 생각도 든다.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다. 장윤성과 프라임필의 지휘를 보며 더 듣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는 깊은 적막감 속의 라흐마니노프였다. 물론 장윤성 지휘자가 곡을 장악하고 연출하고, 설득하는 능력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날 느낄 수 없었던 건 그 반대 지점이었던 것 같다. 일례로 정신없이 쏟아지는 음표 속에서도, 악기들이 자기목소리도 성실하게 냈지만, 계속 몰입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시종일관 악기들이 동등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최선의 음악을 위해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야할 섹션이 있고, 서포트를 해야하는 섹션이 있다. 그런 밸런스가 필요해 보였다. 그냥 슬쩍 지나가야만 하는 파트는 그냥 두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조금은 관조적으로.

 

그럼에도 연주를 맡은 알렉산더 말로피예프의 연주는 훌륭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주요 패시지마다 연주자 본인의 의도가 보였고, 내성부를 끌어내려는 노력도 보였다. 그러는 중에도 작곡가가 아닌, 자신의 모습만을 보여주려는 과시적인 연주도 없었다. 공연중 내내 든 생각은 “말로페예프는 이 장대한 패시지를 단지 의무적으로 소비하는게 아니구나” 였다. 실제로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곡을 연주할때 자의식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 그 자체가 자신의 세상인 것 처럼 곡은 그냥 흘러간다. 라흐마니노프에겐 작품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대목이 보이지 않는다. 나르시즘과는 또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자의식이 넘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huhmyeong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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