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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동의 오페라로 보는 세계사] 오페라와 여인의 사랑③ <나비부인>희생의 사랑_오페라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
  • 김현동 축제, 공연 제작자
  • 승인 2022.08.1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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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서남부 항구도시 나가사키의 어느 언덕에, 한 젊은 미군 사관의 현지처가 되어 지내던 어린 게이샤 <쵸쵸>는 주둔지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미군 사관인 핑커톤의 아이를 낳아 기르며 남편의 귀환을 기다린다. 결국 남편이 미국으로 가서 미국 여인과 결혼하고 자신을 잊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만다는 동양여인의 강제된 순종과 희생을 유럽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소설과 오페라가 바로 <나비부인>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극동 아시아를 소재로 하는 대표적인 오페라도 역시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나비부인>과 <투란도트>라고 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극의 배경이 명나라 시대로 보인다)을 무대로 하는 이 두 오페라는 대항해시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던 비단과 도자기 등의 물품과 홀란드 상인들을 통하여 처음으로 유럽에 일본식 문화가 전해진 후 유럽에서 강하게 일어난 새로운 문예사조인 자포니즘의 영향이라 볼 수도 있고, 그리스 로마신화나 유럽의 여러 사조들에 대한 실증이 이 동양의 물결에 더 강한 매력을 느낀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대 항해시대를 이끈 3인의 항로
 

그 중, 오페라 <나비부인>은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 이미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성황리에 공연하던 것을 푸치니가 감동 받아 작곡을 시작하게 된 작품이다. 푸치니는 이 일본풍이라는 문화에 나름 신선한 감동을 받았던지, 당시 이탈리아에 있던 일본 공사관까지 찾아가 일본의 애국가(예전 버전인 듯)나 민요 따위의 악보를 구해서 오페라 작곡에 많이 인용했다고 전해진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시대적 배경에는 1854년 2월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후 서구열강들의 극동 지역 진출의 교두보가 되어버린 당시 일본의 현실이 그려졌다.

특히 시모다, 하코다테 등 2개 항을 시작으로 하여 나가사키, 가나가와, 니가타 효고 등의 항구도 미국에 차례로 개항하게 되면서 일본의 전 지역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군대와 상선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일본의 산업과 문화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에 의해 강제개항 된 시대적 배경에는 당시 극동아시아가 처해 있었던 역사적 필연성이 투영되어 있기에, 이 오페라 <나비부인>을 단순히 한 명의 어린 게이샤의 순정 드라마로만 이해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역사적 진실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후추쟁탈 전쟁>

11세기부터 약 200여 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전쟁의 실패는 서유럽에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예혁명의 바람을 몰고 오게 되었고, 비잔틴제국은 그 세력이 약해져 급기야 셀주크제국에 멸망하게 되어 지중해 무역의 패권이 기독교세력인 비잔틴제국에서 이슬람세력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특히나 이러한 지중해패권의 변화에 가장 큰 경제적 피해를 입은 나라는 바로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었다.

그동안 이탈리아와 비잔틴제국을 거쳐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하던 동방 무역로는 이슬람세력이 장악하게 되면서 직접무역을 순조롭게 하기 힘들어졌고, 셀주크제국의 상인들을 거쳐야만 인도의 향신료나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등을 구입할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중간상인을 거쳐야 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게는 이런 국제정세는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두 국가들은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이용한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만 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1488년 항해사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1498년 5월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의 희망봉, 모잠비크의 몸바사를 거쳐 5월20일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여 새로운 인도항로를 개척하게 되었고 훗날 마카오와 상하이, 일본을 오가는 무역로를 가지게 된다.

스페인도 역시 1492년 이탈리아사람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탐험가 마젤란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인도를 거쳐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오는 태평양 항로개척을 이루게 된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첫 상륙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의 일본 상륙>

1543년 마카오에서 동남아로 가던 중국 상선이 일본 다네가시마에 표착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조총이 일본에 전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이 항로를 따라 유럽의 문화를 배우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탈리아반도 로마에까지 유학생을 보내게 되는데, 이로써 일본은 조선침략(임진왜란)의 발판을 마련하는 준비를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1600년 일본에 표류한 홀란드 상선에 타고 있던 영국 선원 윌리엄 에덤스를 붙잡아 통하여 일본은 서양식 조선기술을 전수받기도 하는데,

윌리엄 에덤스는 일본 최고 실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나가사키항구 입구에 홀란드와 독자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특구를 지정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유럽에는 일본풍의 도자기, 부채, 그림이 전해지게 되었고 이들 홀란드 상인을 상대하는 매춘업도 서서히 생겨나게 되었다.

1853년 멕시코와의 영토전쟁을 마치고 중국을 향하던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끈 4척의 군함(흑선)에 의해 강제개항을 하기까지 홀란드는 일본과의 독점적 무역을 이어갈 수 있었다.

 

<미국의 팽창과 일본개항>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인도항로를 통한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홀란드 등의 국가와는 달리 태평양을 건너야만 중국이나 인도차이나반도로 올 수 있었던 미국은 물과, 식량 등을 공급해주는 중간보급지가 필요로 했고, 일본이 가장 적당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해서 1853년 네 척의 증기선을 타고 중국으로 가던 미국의 페리제독은 일본 요코하마 근처에 나타나 강제로 개항과 무역을 하게 해 달라고 위협을 한 후 돌아간다.

그 후 1년 뒤인 1854년 2월, 더 많은 군함을 거느리고 나타난 페리제독의 함포위협 앞에 일본의 막부정권은 하는 수 없이 미, 일 상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고 기존 2개 항구 외에 네 개의 항구(나가사키, 가나가와, 니가타 효고)를 더 미국에게 개항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875년 일본은 조선의 강화도에 나타나 소란을 부리고 조선에게 강제로 개항을 요구하여, 바로 자신들이 불평등하게 조약을 맺은 그대로 조선을 강제 개항한다. 이것이 바로 운요호 사건이고 조,일 불평등조약의 시초인 강화도 조약이다.

 

 

<사무라이의 몰락과 게이샤의 출현>

미국의 일본강제개항은 일본의 200년 막부정치를 무너뜨리게 되고 농업과 가내공업중심의 일본 산업구조를 통째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정권을 휘어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막부정권에서는 천황의 존재는 그저 이름뿐인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권력의 최고 중심에는 쇼군이라는 막부의 최고 수장이 있었고, 이를 떠받드는 군사 귀족계급을 사무라이라 불렀다.

하지만 개항이 되고 밀려들어오는 서양군대와 경제약탈세력들 앞에 막부의 힘은 그저 약하기만 하였고 점점 지방의 신진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나약한 막부에 대해 반발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결국에는 군소 다이묘들이 이름뿐이던 천황를 앞세워 힘을 잃어버린 막부정치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정치혁명을 선언하는데,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알리는 메이지유신이다.

 

그동안 막부를 비롯하여 여러 다이묘에게 소속되어있던 하급 귀족계급이었던 사무라이계층은 총과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새로운 군대에 밀려 그 존재가 쓸모없어졌고, 많은 사무라이들은 할복까지 하며 자신의 주군들과 운명을 같이 하거나 훗날 조선으로 건너와 낭인생활을 하는 등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런 국가의 대변혁 분위기 속에서 사무라이집안의 아녀자들은 사회적으로 큰 문젯거리가 되고야 말았다.

평생을 귀족생활을 해 오던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해서 이들이 향한 곳은 매춘굴과 소위 게이샤라고 불리며 춤과 노래 등 기예를 보여주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다.

더러는 새로운 귀족계급의 첩이 되거나, 일본현지에 파견된 서양인들의 현지처 역할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소설 나비부인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 살아간 어린 게이샤의 삶을 조명하여 그린 작품인 것이다.

 

 

<귀족출신 게이샤의 선택>

나비부인으로 나오는 15세의 어린 게이샤 이름은 <쵸쵸상>이다.

<チョウ/죠오>는 일본어로 나비인데, 쵸쵸 라고 동의반복 이름으로 부른 것이,

당시 이런 직업의 여성에게는 동일한 발음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던 서구식 문화에서 온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메쵸상 이나 오쵸상 같은 호칭대신 쵸쵸상 으로 부른 것은 <Mimi / Dodo / Juju> 같은 느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여인들의 정상적인 이름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성을 상품으로 파는 행위를 하며 생활하는 여인, 즉 화류계의 여인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La Bohème>에 나오는 여주인공 미미 역시도 본래 이름인 루치아<Lucia> 대신 사람들은 그녀가 하는 일이 몸을 파는 일이라 생각하여 미미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19세기 당시 서양인들에게 비춰진 동양 여인들의 모습은 남자를 위해서 희생하며 죽을 수도 있는 순종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고, 지금도 많은 서양인들에게 동양 여자의 이러한 이미지가 씌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서 나비부인을 바라보는 우리 동양인들의 마음은 썩 즐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쵸쵸>라는 어린 귀족출신 게이샤의 최후선택인 자결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 남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위하여 그가 희생함으로 그의 아들의 미래와 그가 사랑한 미국인 핑커톤의 가정을 위한 순고한 희생으로만 보면 곤란하다.

당시 일본의 몰락한 귀족신분의 사무라이계급, 그들의 상당수는 변화하는 일본의 제도와 서양의 군사조직에 순응하거나 비굴한 협조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명예로 여겼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낭인생활을 하면서 여러 식민지에 흩어져 각자도생의 선택을 한 집단들도 있겠으나,(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와 수많은 이권사업에 뛰어들고 급기야 명성황후 살해의 도구로도 전락하게 된다.) 많은 사무라이와 그들의 가족들은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어린 게이샤 쵸쵸상이 굳이 결혼식이라는 무모한 이벤트를 고집하고 친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로 개종까지 한 이면에는 당시 모두가 그렇게 보고있듯이 한 미국인의 일시적인 현지처 생활이 아니라, 정식적인 부부관계임을 자신을 아는 모든 이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녀의 간절한 노력이었다.

 

                 "명예롭게 살지 못한다면 명예롭게 죽어라"

                                                          "

 

하지만 그의 남편이 결국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미국여인과 결혼한 사실을 안 이상,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이자 마지막 사무라이가 선택하였듯,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다며 자결한 그 방법대로, 한낱 일순간의 노리개였던 여자로는 살아남지는 않겠다는, 일본 귀족여성으로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선택이 바로 자결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무라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자결하며 사용하였던 바로 그 칼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말이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저 한 어린 동양여자의 숭고한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이 오페라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바라보는 한 동양여인의 선택은 바로 자신과 가족의 명예, 그리고 자식의 미래를 위한 당당함과 고귀함이 묻어있는 선택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한 관점이라는 생각이다.

 

김현동 축제, 공연 제작자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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