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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근의 리허설룸 3] 바그너의 파르지팔 1_슈투트가르트쉬투트가르트 극장의 충격적인 레지테아터 <파르지팔> 무대들

1993년 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해서 입학시험 관련 정보를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며 독일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독일 생활 첫걸음에 일일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성격도 있지만 피아노를 주로 다루는 음악가들은 성악이나 관현악과는 달리 무대 위에 혼자 서야 하는 과중한 압력에 대한 면역기능으로 유달리 자존심이나 독립심이 강하다. 필자가 경험한 독일 내 한국 음악유학생들의 독일어 실력은 관현악, 실내악, 합창 등의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일반생활, 연습 시 소통에 월등히 능숙하다.

 

당시에 슈투트가르트 합창단원으로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유학 첫해부터 적지 않은 중요한 공연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유럽에서 가장 앞서나가던 충격적인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가가 의도에 따라 시공간적 설정을 바꾸는 극) 앙상블을 가지고 있던 극장이 슈투트가르트였다.

오다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동양 발레리나도 한발짝 거리에서 본 듯했지만 인사를 나눌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내 머리속에는 온통 보고 싶은 오페라밖에 없었다.

알반 베르크의 '보쩩',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바그너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등 한국에서 어렵사리 구해 봤던 고전적 연출들이 머리 속에 붙어있던 나에게 슈투트가르트 레지테아터는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고 되지도 않는 독일어 실력으로 신문, 전문문화잡지의 모든 평론가의 리뷰를 읽어내려갔다. 어찌나 괴상한 독일어로 가득차 있던지 도대체 호평인지 악평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상상했던 세계와 너무나 동떨어진 유럽오페라극장의 현대적인 공연을 보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도 한국유학생 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고 스스로 독일어 실력을 보강해 다른 소사이어티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에 한국유학생으로 슈투트가르트에는 공대생들이 주류였고 인문학 계열에는 튀빙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수학을 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한국 유학생 커뮤니티와는 음대 내에서 교류로 한정되었고 혼자서 경제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독일 내의 오페라극장을 찾아다녔다.

주로 바그너와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대형 오페라를 보러 다녔고 경비는 학생으로 꽤 부담이 되었지만 학생증을 지참하고 공연당일 한시간 전에 매표소에 줄을 서면 10마르크에서 15마르크 정도에 남은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문제는 두 작곡가의 오페라들의 공연시간이 평균 5시간을 넘는다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면 이미 모든 대중교통 수단은 끊겨있었다. 호텔이나 여관을 찾아서 숙박할 생각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엔 공연 티켓보다 호텔비로 써버린다는 것이 학생 신분으로 지나친 사치로 느껴졌고 기차역 근처에 밤에만 여는 허름한 맥주집에서 시간을 때우고 새벽 기차로 돌아와 다음날 수업에 비몽사몽으로 참석하곤 했다. 생활비와 간간이 생기는 작은 연주료로 번 돈의 대부분은 두 작곡가의 CD를 사는 데 사용되었고, 두꺼운 스코어는 음악도서관에서 3주간 빌려다가 복사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경험한 충격적인 연출 중 가장 인상적이였던 작품은 쿠르트 바일의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이었다. 1996년에 고인이 된 동독 출신의 유명한 레지테아터 여류 연출가인 루트 베르크하우스의 연출로 지금도 눈에 선하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을 맡자마자 머리속에 꽁꽁 숨겨 놓은 카드로 사용했다.

그리고 다른 성격의 위로와 희열을 주었던 작품이 독일 정통파 노장 괴츠 프리드리히가 연출한 바그너의 <파르지팔  Parsifal>이었다. 한국에서 1958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크나퍼츠부쉬 지휘로 혼자 방에 처박혀 수도 없이 턴테이블 바늘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5장의 LP판을 빈대떡 뒤집듯이 침을 꿀꺽 삼키며 청승을 떨었었다. 유학 떠날 때 비행기 20Kg 수하물 제한 때문에 유일하게 들고 간 거금의 4장이 들었던 레바인/바이로이트 파르지팔 CD였다.

하옇튼 슈투트가르트 극장의 첫 <파르지팔> 라이브 경험은 영원히 독일에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까지 했었다. 다른 공연과 달리 지휘자의 등장 인사 없이 어둠 속에서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생명의 빵’의 테마로 시작되어 영화관에서나 듣던 돌비 서라운드 음향이 극장 안에 넘실됐다. 무대는 극도로 압축된 하얀 숲이 순결의 상징적인 배경이 되고 유일하게 쿤드리만 적나라한 자주색 창부의 의상이 주어졌고 대부분 조명으로만 연출이 되었던 것 같다. 소리와 빛이 어우러져 심연까지 파고드는 예술의 경지였다. 제1막이 끝났는데 관객들이 박수를 치지 않길래 한국식 안다박수를 신나게 치려다가 뭔가 이상해서 꾹 참았다. 어? 이거 뭐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괴상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후 학교에 입학하고 헤세의 ‘데미안’에 나올 것 같은 안경잽이 독일 애와 친해져서 파르지팔 박수에 대해 물어봤다. 대답인즉슨, 제1막 2부는 영성체의식으로 성스러운 하늘의 예언이 하강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막이 내리더라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는 전통적으로 박수를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얼굴색이 변하더니 조곤조곤 바이에른 공무원 억양으로 오징어 씹듯 파르지팔의 문제점을 열거하더니 급기야는 분에 못이긴 듯 이 작품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한국인이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감상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자신과 상관없지만, 죄와 구원이라는 주제로 온갖 종교를 짬뽕시켜놓고 예술종교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사기를 넘어 모독이라며 나한테 화풀이를 해댔다. 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도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어떻게 반박하기엔 나의 지식의 한계가 깻잎 한 장 정도가 아니라 깨진 수박통처럼 느껴져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상한 자존심 때문에 니체, 쇼펜하우어를 뒤적이게 되었고, 내 인생의 방향이 전혀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한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관해 몇 차례에 나눠 지면이 필요할 것 같다. 할렐루야….

 

글/ 윤호근

사진/ 독일 칼스루에, 김진수

 

https://youtu.be/wxlcqS5ly6c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 1987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지휘/ 다니엘 바렌보임, 연출/ 괴츠 프리드리히

 

윤호근 지휘자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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