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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의 소리비평] 거리유세라는 버스킹과 극장국가생활을 위한 소리 및 권한을
  • 박종현 뮤지션, 월드뮤직센터 기획팀장
  • 승인 2022.03.1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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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공연(公演, 공적으로 펼친다)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거리유세는 버스킹(busking, 길에서의 예술 연행)의 일종이다. 소리를 냄으로써, 소리내는 주체의 능력과 매력을 관객석에 앉은 특정 소수가 아닌 열린 공간의 불특정 다수에게 어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2022년 3월의 어느 날, 서울의 여기저기는 대선 거리유세라는 버스킹 행위들로 가득해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교차로라든가 갓길, 지하철역 입구 앞 공터 등등엔 유세차 한 대 혹은 여럿이 들어서 있다. 십여 명의 후보를 대표하는 색깔 중 하나로 물들어 있다. 한반도에서 여러 번의 선거를 겪어온 나는 이러한 색들이 누구 혹은 어떤 이념을 표현하는지, 그것들이 어떤 역사를 지니며 변해왔는지 안다. 그리고 선거라는 이벤트를 위해 많은 이들이 이러한 역사를 고려하면서 색을 어떻게, 어떤 형태 속에서 표현할지 고민하였음을 느낀다. 그간 보지 못했던 새로운 빛깔을 보면 그게 어떤 새로운 이들의 것이며 왜 저 색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솟기도 한다. 어떤 색 옆에 다른 색이 바로 붙어있어도 우리는 헷갈리지 않으며, 오히려 대조를 통한 구도의 강조로 읽힐 여지도 있다. 소리와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그 풍경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들을 들을 때, 나는 홍대입구역 근방의 버스킹 존에서 종종 보았던 어떤 아비규환을 떠올린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한때 지자체에서 직접 연행자들의 신청을 받아 운영되었던 그곳에는 성인 세 명 정도가 양팔을 같이 뻗으면 지름이 되는 크기의 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배정된 원 안으로 신청자들이 직접 가져온 앰프와 마이크, 악기를 들고 입장한 뒤 음악을 펼쳐내는데, 당연히도 소리들은 원을 넘어 옆의 소리들과 서로 겹치고 그 자체로 이미 거슬린다. 하지만 백이면 백, 그들 중 일부가 그 겹침을 참지 못하고 혹은 자신을 더 어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음량을 증폭시키고야 만다. 그렇게 하는 이들은 음량이 커질수록 자신의 음색과 가사가 더 잘 전달된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공간은 그대로인 채 음량만 과도해지면 대중음악에서 소위 말하는 ‘딜리버리(전달력)’는 외려 실패하고 음악 전체는 웅웅대는 소음에 가까워진다. 그 옆의 원들은 그 소음에 대항하여 같이 증폭을 선택, 결국 더 넓게 겹친 채 다같이 웅웅대거나, 혹은 증폭하지 않은 채 옆 소음에 묻혀 존재감을 잃고 작은 웅얼거림이 되어버린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좋지 않다.

 

그 풍경을 겪은 느낌이, 내게는 유세차들이 펼치는 삼류 버스킹을 지날 때와 다르지 않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둘 혹은 세 빛깔은 시각적으로 공존할 수 있지만, 하나의 공간성 안에서 경쟁적으로 틀어놓은 소리들은 음악이든, 연설이든 그것이 가진 음향적 미학도 잃고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은 채 불쾌한 소음으로만 남는다. 공간이 작고 유세차가 단 한 대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음량이 크면 유세용 노래 가사와 메시지와 그 뒤의 후보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들릴 것이라 착각하는 모양이다. 앞서 썼지만, 음성/음향 언어의 전달력은 공간에 맞는 적당한 크기와 장비 자체의 기능에 달려있지 절대 음량과는 거의 무관하다. 대부분은 커버곡이기에, 전달되는 것은 이게 누구의 어떤 메시지인지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후보 이름 앞뒤에 있는 원곡의 알려진 가사뿐이다. 커버 음악을 열심히 심지어 엄청나게 잘 소화하는 거리 공연을 보고 나면 그 노래가 뭐였는지는 생각나는데 음악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는 그런 느낌이 된다.

어떤 빛깔을 어디서 어떻게 쓸지 그렇게 고민하면서, 어떤 소리를 어떻게 쓸지는 왜 그만큼 고민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후보를 비롯한 주체들이 암묵적 데시벨 협정이라도 맺어, 후보와 당의 이름과 공약을 담아 개사한 노래들이 각자 거리를 두고 은은하면서 선명하게 전달될 수 있으면, 아니 최소한 귀를 긁는 커다란 소음을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 예를 들면 외국어로 된 오페라가 대사나 지문을 옆 스크린에 올리듯이, 선거용 음악을 정말로 공적 홍보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다면 각 유세차가 무대고 그 행위가 공연이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공간과 음향의 구성을 근사하게 짜내면 제발 안 될까,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음악이든 소음이든, 불쾌하든 말든 관계없는 어떤 소리의 장르임을 안다. 음량의 크기 자체가 중요한 장르로서, 거리의 이목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후보의, 작게는 유세차 앞에 모인 후보 지지자 집단의, 크게는 후보와 지지자를 포함한 ‘모두’가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참여하는 국가적 행사 자체의 ‘스펙터클’함을 과시하고 전달하는 것 자체가 기능이자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극장-국가라는 비유틀을 사용하면서, 국가가 국민이라는 관객 내지는 공동연행자들과 함께 국가적 제의라는 스펙터클을 치러냄으로써 국가 자체를 거듭하면서 거듭내는, 나아가 스펙터클의 연속 그 자체로서의 국가를 성립하고 유지시키는 어떤 모델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한반도 대부분에서 지정된 장소에 고립되고, 허가되고, 관리되고 제재되는 다른 버스킹 장르와는 달리 길거리 여기저기가 시각, 청각적 공해에 관련된 제한도 없이 (데시벨 제한이 곧 생긴다고는 한다) 특권적으로 허가되는 것은, 선거가 국가라는 극장의 의례이고 따라서 영토 전체가 무대이자 관객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 중 하나인 나는 오늘도 생계를 위해 서울 어드메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바로 앞 길가에서의 커다란 유세 소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몇 번 눈을 질끈 감았다. 

선거가 국민 ‘위’의 사람이 아니라 국민 ‘중’의 대표를 뽑는 것이라면, 나와 내 주변의 생활을 위한 소리 및 그와 관련된 권리를 함부로 ‘묻을’ 수 있는 권한을 누구든간에 -다른 국민이,  혹은 그 대표의 후보자든 누구든- 동의 없이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생각을 누군가는 무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박종현 뮤지션, 월드뮤직센터 기획팀장  themove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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