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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수의 무빙액트] Sound of Silence- <페터 한트케의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문화비축기지 T2 야외극장
  •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 승인 2021.09.1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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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이 나타나 하나둘 걷기 시작했다. 무대를 이리저리 밟아 보고 몸을 푼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잠시 멈춰 서서 몸을 휘휘 돌려보기도 한다. 모두 검은 옷을 입었다. 검은 옷이 상징하듯 그들은 각각의 배우 자신이기도 하고, 또 아무도 아니기도 하다. 제각각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몸짓으로 모여지기도 하는데, 이 역시 그렇게 한 것인지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무대로 쓰였을 것 같은 나지막한 단 위에 앉아 우리는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보고 있긴 한 건지도 애매하다 싶던 순간, 바람이 불어온다. 숲이 흔들린다. 매미가 운다. 풀벌레 소리. 해의 꼬리를 따라 그렇게 시간이 갔다.

 

무대는 광장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 직선으로 곡선으로 지그재그로. 빠르게 또 느리게. 터덜터덜 후다닥 비틀비틀 질척질척. 술 취한 행인이 가고, 행복한 연인이 가고, 무심한 젊음이 가고 메마른 늙음도 간다. 눈물을 뿌리며 가고, 차갑게 돌아서 간다. 훨훨 춤추며 가고 뚜벅뚜벅 일터로 간다. 달아나고 쫓아간다. 살리러 가고 죽이러 간다. 그렇게 꿈처럼 시간이 갔다.

페터 한트케의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에는 무려 450명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행동을 하며 광장을 오고 간다. 작가는 하루 동안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여 기록했다. 그들 중에는 성서 속의 인물도 있고, 바보 광대도 있고, 전에 어디서 본 듯한 인물도 있다. 가만 보다 보면 지금이 언제 인지, 여기가 어디 인지도 희미해진다. 너무도 뚜렷한 현실 위로 환상이, 몽상이, 착시인 듯 겹쳐지고 겹쳐지다 부옇게 흐려진다. 소리도 오고 간다. 도시의 소음이 무거운 쇳소리로 부딪히고, 음악이 들렸다가 다시 매미가 울다가. 계절이 가고 시절이 간다.

 

김아라 연출은 페터 한트케의 광장을 우리 가까이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 속에 한 명의 노숙자를 심어 놓았다. 그는 페터 한트케와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다. 그는 광장에 머물러 있고, 우리는 고독하고 처량한 그의 시선을 따라간다. 광장 위에는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별다른 이야기도 없다. 그런데도 점점, 사라지는 사람의 마지막 한 걸음까지 놓칠 수 없어 끝까지 쫓아 눈에 담는다. 사람이 이야기다. 말은 하지 않지만 걸음마다 마음이 담겼고, 뒷모습에 사연이 서렸다. 사람이 간다. 쓸쓸한 사람이다. 고독한 사람이다. 고단한 인생이다. 상처받은 영혼이다.

 

입을 가린 시대에 입을 닫은 이 연극은 낯설면서도 잘 어울리는 그릇이다. 사람이 다가오면 척력이라도 작용한 듯 슬쩍 거리를 두고 몸도 눈도 피해 가는 시대. 벽은 높아지고, 세대는 멀어지고, 계층은 갈라지고, 손잡는 것이 되려 특별해진 시대. 이전에도 쳐다보지도 않던 인생들을 이젠 아주 작정한 듯 고개 돌리는 이 시대에 연극이 눈길을 준다. 오래오래 바라본다. 지켜본다. 살펴본다. 노배우가 입술 굳게 사려 물고, 지금껏 걸어온 인생길을 지나 또 다른 시간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젊은 예술가들이 맨발로 땅을 박차고 새길을 뛰어간다. 가던 길에 멈추어 서로 마주 본다. 발견. 보고 또 본다. 드디어 다가가 어깨를 붙이고 함께 다른 시간을 본다.

 

다시 광장은 텅 비었다. 사람들은 가 버렸지만, 광장은 떠난 이들의 걸음을 품고 있다. 광장은 그렇게 시간을 담고 있다.

 

진남수(호원대 교수, 극작가, 배우)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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