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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수의 무빙액트] 괜찮다. 넌 아무것도 아니다 – 창극 <나무, 물고기, 달>
  •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 승인 2021.04.1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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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야기도 참 재밌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렇게 딱 들어맞는 말을 잘도 찾는지. 크고 작은 소리의 조절은 물론이요, 듣는이의 숨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사이의 조절도 자유자재, 능청스러운 시치미도 구성진 감탄사도 기차다. 그럴 때의 이야기는 생생하기가 그림 같다. 또한 시종 듣고만 있으면서도 함께 대화를 나누는 듯하여 저절로 추임새가 나기도 하고, 떠들썩하게 웃다가도 금세 귀를 쫑긋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속으로든 겉으로든 쉴 새 없이 그에게 묻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게 누군데? 아니 왜? 걔는 왜 그랬대?” 이야기는 이야기의 꼬리를 문다. 우리의 궁금증도 꼬리를 문다.

 

하늘극장에 들어섰다. 극장이 좋아졌다. 객석도 말끔하고, 천장도 닫혀있고. 무대도 깔끔하니 예쁘다. 원형무대를 가진 열린 극장에는 색다른 설렘이 있다. 프로시니엄 무대가 관객을 ‘없는 사람들’ 취급하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비해 원형무대는 태생이 더불어 함께하는 공간이라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어우러질 것만 같은 기대감이 절로 돋는다. 자리를 찾아 앉고는 곧바로 객석에 앉은 모든 관객들을 한 바퀴 빙 둘러본다. 바닥도 둥글고 천장도 둥글고 무대장치로도 둥글다. 악사들이 자리에 앉고, 희고 고운 옷을 차려입은 세 사람의 소리꾼이 조용조용 사뿐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국립창극단이 올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은 '나무, 물고기, 달(배요섭 연출, 이자람 작창 작곡)'이다. 이야기는 어떤 소원이든 머릿속에 그리는 대로 이뤄준다는 ‘소원나무’를 찾아가는 소녀와 소년, 순례자, 사슴과 나무, 물고기 등의 험난한 여정과 깨달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시공을 뛰어넘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데, 눈에 보이는 옷이며 장식이며 몸짓 손짓 하나하나, 들고 나는 걸음까지 모두 곱고 정성스럽기 그지없다. 귀에 들리는 음악들도 하나하나 생소하면서도 정겹고, 편안하면서도 놀랍다. 연극적 상상력과 소리의 아름다움이 창극의 품에서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

 

소원나무를 향해가는 길에서는 만남이 사건이다. 악당도 괴물도 없다. 충돌의 고비도 없다. 소원나무 원정대는 가다 보면 만나고, 만나서는 같이 간다. 무대로부터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첫눈에 알아보고 찬찬히 새겨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먼 곳에서 온 특별한 사연들을 살펴보고 둘러보고 다시 귀 기울이다 보면, 보고 듣는 사이에 날이 가듯 세월 가듯 그들이 가버린다. 나의 관심을 고백하기도 전에 은유와 상징의 세계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두고 그들은 각자의 소원을 쫓아 길을 떠나버린다. 그렇게 휙휙 달려 그들은 어느새 소원나무 앞에 당도해 있다.

 

소원나무는 그들의 바람처럼 마음으로 상상했던 것들을 눈앞에 가져다준다. 햄버거에 주먹밥, 아름다운 여인까지. 헌데 마음에 든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소원나무는 외면하고 싶은 모습들과 온갖 두려움까지도 살려낸다. 소원원정대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고 산을 내려온다. 엄청난 반전이 있는 것도, 기대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아니다. 주제는 뻔할 정도로 익숙하고 소박하다. 그런데도 뒤통수가 뜨끔하고 가슴이 후끈해진다.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것도, 욕망도 두려움도 보면 사라진다. 담담한 이야기는 한 줄 시가 되었고, 노래가 되었고,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 위에 타박타박 위로로 남았다.

“넌 아무것도 아니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행복도 잠깐 불행도 잠깐. 지나가면 그뿐이라.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진남수 호원대 교수 / 극작가, 배우  namsuls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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