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일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손 그림자놀이’, ‘그림자 잡기(밟기)’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물체 뒤에 드리워진 검은 그늘이다. 그 그림자가 일렁였다. ‘흔들림’, ‘동요’로 표상되는 그림자가 무용으로 빛을 흡수한다. 굴절도 되고, 때론 반사된다. 최원선본(本)댄스컴퍼니라는 단체명에서도 알 수 있듯 본(本)에 대한 진중한 사유가 무대미학에 투영됐다. 2023년 6월 29일,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진행된 이번 공연은 그림자라는 또 하나의 몸짓을 만난 시간이다.

삶의 가치에 대해 문답한 이번 공연은 성찰(省察)이란 미덕을 일깨웠다. 가깝고도 먼 그림자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때론 객체가 돼 실체를 역(逆)으로 그려낸다. 현상과 본질에 대한 양가성을 봄날 아지랑이같은 은유적 속삭임, 지성적 안무로 채웠다. 삶을 바라보는 안무자의 관조와 응시는 실재와 존재라는 철학적 담론과 조우했다. 철학이 춤언어로 치환해 소통의 채널이 된 것은 작품의 성과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대서사시 ‘단테의 신곡(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 중 ‘지옥의 문’ 맨 꼭대기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지옥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로댕이 ‘지옥의 문’을 조각하기 전에 지옥의 생생한 절규를 담기 위해 이 책을 탐독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테의 신곡 첫 구절이다. “우리 인생길 한가운데서 나는󰁚어두운 숲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그건 내가 올바른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아, 얼마나 말하기 어려운지󰁚거칠고 가혹한 그 숲󰁚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좌표를 잃고, 때론 어떠한 좌표도 보이지 않는, 아니 볼 수 없는 안갯속 길을 가야만 하는 삶에 대한 단상을 집약한다. 안무자는 작품 속 화자를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본다.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통렬히 일깨운다. 묵직하되 여운있다. 통렬한 맛이 배가된다. 안무자가 그 동안 창작작품에서 보여준 예술관은 일관성을 유지하되 한 단계 더 진일보시킨 것은 앞으로의 춤작업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공연이 시작되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춤이 시작된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두려움과 고통을 반영한다. 살을 찌르는 듯한 통렬한 하소연, ‘부수지소(膚受之愬)’다. 이어지는 군무가 일렁이는 그림자가 된다. 비트있는 음악속에 블랙의상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활달해진다. 여자 솔로춤 후, 현(絃)의 소리와 하나된 앙상블이 유유하다. 1장 ‘부수지소’ 후, 상처입은 자아의 부유와 침잠이 ‘텅 빈 눈’(2장)에 담긴다.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그린 ‘뒤틀리고 부서진 그림자’(3장)를 지나 새벽녘 푸른빛만이 손짓하는 ‘깊고 고요한’ 4장, ‘일루젼(illusion)’으로 집약되는 5장이 그림자라는 허상, 우리 자신은 허상인 그림자의 환영이 됨을 알린다. 뭇웃음 짓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림자의 비밀이 열린다. 그 비밀은 그림자만이 안다.

동행자이자 감시자, 주체이자 객체로 연결짓기 가능한 그림자의 속성이 철학이란 그릇에 담긴 이번 작품은 철학성 강한 안무자의 고뇌와 성찰을 담았다. 또한 닮았다. 일렁이는 그림자의 단면을 한면으로 바라보고 재단하는 ‘단면(斷面)’이 아니라 둥글되 집적된 ‘단면(團面)’을 탄생시켰다. 그림자는 나(我)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我)이기 때문이다.

이주영 무용칼럼니스트  jy03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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