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Flowers>, Digital Image &#9400;이수민

예로부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사군자’로 불리며 선비의 높은 품격과 덕을 표현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매화는 ‘한겨울 추위의 고통을 겪은 후에 맑은 향기를 뿜어내고, 사람은 역경을 만나서야 그 절개를 드러낸다’라고 묘사되는데 실제로 매화는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다. 그 향기는 몇십 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짙고 풍부하다.

선조들의 사군자 사랑은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홍도는 오래도록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했는데 오랜만에 그림이 팔려 들어온 거금을 매화나무 한 그루와 좋은 술을 사는데 썼고, 오랜 친구들과 매화 나무 아래에서 향기와 술에 거나하게 취했다고 전해진다.

추위로 모든 것이 얼어붙고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봄의 꽃내음과 함께 살살 풀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예술가들은 얼마나 큰 영감을 받았을까. 꽃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음악들을 소개한다.

라흐마니노프 <라일락>

https://youtu.be/gr3xbB32Cs8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낭만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음악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피아노 독주곡이다. 코를 찌르는 아찔한 연보랏빛 라일락 향기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한 것 같기도 하고, 참새들이 라일락 가지에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 포로록 날아가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3분도 안되는 짧은 곡이지만 다양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中 어느 행복한 날에>

https://youtu.be/SXZNX32E3ew

젊고 아름다운 사교계의 여왕이 순수한 청년을 만나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눈물 섞인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마무리 짓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이야기 형식 중 하나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그렇고 1990년대는 영화 <귀여운 여인>, 2000년대는 영화 <물랑루즈>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La traviata’는 ‘방황하는 여인’이라는 뜻으로 베르디의 오페라는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뒤마는 실존 인물이자 파리 사교계의 코르티잔 마리 뒤플레시스와 자신과의 경험을 소설로 펴냈고 큰 인기를 얻었다. 뒤마가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을 ‘동백꽃 여인’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가슴에 동백꽃 생화를 달고 나오며 자신의 후원자의 부를 은근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느 행복한 날에>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1막에 나오는 듀엣곡이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가 재밌다.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는 ‘이 감정이 아프면서도 행복하다’라며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고백하지만 여자 주인공 비올레타는 ‘다른 여자를 만나보라, 그럼 나를 금방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부드럽게 거절한다. 이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완벽한 화음을 낸다.

구스타브 말러 <뤼케르트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中 부드러운 향기를 맡았네>

https://youtu.be/zKpIZffBk-s?t=137

독일 시인 뤼케르트의 작품은 사후 점차 세상에서 잊혀져 가는 중이었다. 그의 시는 과하다 느껴질 만큼 감정적이고, 잦은 언어유희로 인해 호불호가 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러는 바로 그 특징을 사랑했고 천상의 소리를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하프, 최소한의 인원이 연주하는 부드러운 바이올린, 플루트의 청아한 음색을 활용하여 뤼케르트의 시 ‘부드러운 향기를 맡았네’에 곡을 붙였다.

<부드러운 향기를 맡았네>의 시어 중 ‘Linden’은 독일어로 ‘부드럽다’, ‘보리수’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는데 말러는 이를 동시에 표현하려고 한 듯하다. 성악가가 Linden을 발음하는 그 순간 유난히 부드럽고 긴 호흡이 음악을 이끌어나간다.

알마 말러 <5개의 가곡 中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

https://youtu.be/yf3OREDY1AI?t=216

알마는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하기 전 가곡과 피아노곡 10여 곡 작곡했었다. 말러와 결혼하면서 내조를 원하는 그의 뜻에 따라 음악가로서의 꿈을 내려놓게 되었지만 후에 말러의 지지로 악보를 출판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정원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반짝이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금발의 세 소녀가 달콤한 꿈을 꾸네...’라는 가사를 가진 이 가곡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띈다. 여기서 ‘아버지의 정원’은 소녀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 아늑함, 안전함,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장소를 뜻한다.

슈만 <가곡집 시인의 사랑 中 1-3곡>

https://youtu.be/BRTycmIak8Q?t=1

슈만의 가곡집 <시인의 사랑>은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이 가곡집은 슈만이 클라라와 사랑의 결실을 맺던 해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마음 속 설렘과 생동감이 잔뜩 묻어난다.

연둣빛 새싹이 올라오고, 새들이 노래하는 오월에 내 마음 속에서도 사랑이 피어올라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한 청년. 1곡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달 오월에> 가사는 가슴 벅차 어쩔 줄 몰라하는데 피아노 파트는 우울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다.

2곡 <나의 눈물로부터 피어나네>에서는 ‘네 생각에 눈물과 한숨 짓는 나, 이런 나를 사랑해준다면 꽃을 그대에게 모두 바치리’라는 청년의 말이 유난히 공허하게 들린다. 3곡 <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합쳐도 그녀보다는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가사에서 위트가 느껴진다.

에른스트 <여름의 마지막 장미 주제에 의한 변주곡>

https://youtu.be/uA0ugX-v5NU

바이올린 한 대로 다양한 악상을 펼쳐놓고 그 소재를 자유자재로 요리한 원조 음악가는 니콜로 파가니니이다.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였던 에른스트는 파가니니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데 바이올린 독주곡 <여름의 마지막 장미>만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곡은 본래 아일랜드 시인 토머스 무어의 시에 존 스티븐슨 경이 멜로디를 붙여 널리 불려졌던 노래이다. 오페라의 주요 아리아처럼 귀에 딱 꽂히는 첫 부분의 테마 이후 여러 테크닉을 활용하여 변주하고 화려한 피날레로 끝을 맺고 있다.

귀 기울여야 할 부분은 영상의 5분 30초 쯤 왼손이 음정을 끊임없이 짚는 동시에 음정을 짚지 않는 두 손가락을 사용하여 줄을 튕겨 테마 멜로디 음정을 반복하는 부분이다. 극악의 난이도를 가진 기법으로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들이 앵콜곡으로 자주 연주한다.

이수민 _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 음대 기악과 학·석사, 인디애나대 음대 연주자과정을 졸업한 이수민은 클래식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또한 기업체 강연자, 공연 해설자, 칼럼니스트, 유튜브 [클언니] 운영, 1년간 EBS 생방송 뉴스 공연리뷰 코너 고정 패널 등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클래식 입문서 <미술관에 간 바이올리니스트>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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