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유윤종의 음악사에 숨은 인문학
투란도트의 군중은 왜 변덕스러운가?
G. Puccini

 

유윤종의 음악사에 숨은 인문학 ④

 

지난 4월호에서 베르디와 갈등을 빚었던 ‘스카필리아투라’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베르디의 후계자 푸치니의 이름을 화제에 올렸지만, 이번에 푸치니 이야기를 한 번 더 해보고자 한다.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인 <투란도트>는 유독 오늘날 인기가 높아가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7월 27, 28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자체 제작 여름 레퍼토리로 이 대작을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1924년 푸치니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다가 후배 작곡가 알파노가 최후의 2중창 부분을 마무리해 1926년 비로소 초연된 이 작품에는 예전에 없던 종류의 주인공이 있다. 이 작품은, 이 캐릭터를 부르는 호명(呼名)으로 시작된다. “북경의 사람들이여(Popolo di Pekino), 법에 의해 다음과 같이 밝히노라.” 그리고 그 호명에 이 캐릭터가 응답하면서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새로운’ 주인공은, 바로 군중(Popolo․People)이다. 푸치니 이전의 수많은 오페라에서 합창단이 ‘군중’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장면에 맞춰 마을사람들, 군인들, 순례자들 등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투란도트’에서 이들은 단 하나 ‘군중’일 뿐이다. 1막부터 끝막까지 ‘북경에 사는 평범한 피지배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페라 속의 ‘Popolo’는 어떤 캐릭터인가?

1막에서는 핍박받는 군중이 부각된다. 관리들이 소란떨지 말라며 채찍을 휘두르면 그들은 신음을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배자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를 향해 ‘숫돌을 돌려라, 칼을 갈아라’며 재촉하고, 투란도트 공주의 모습이 나타나자 공주의 이름을 연호하며 엎드려 절한다. 남자 주인공 칼라프 왕자가 투란도트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수수께끼 맞히기에 도전하는 2막에서 이 군중은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수수께끼를 하나씩 맞혀가는 왕자를 성원하며 그의 성공에 적극적으로 환호하는 것이다. 평범한 백성에서 지배층으로의 상승을 이뤄가는 왕자의 모습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막에서 ‘군중’의 모습은 또다시 바뀐다. 처음에는 1막과 마찬가지로 지배질서에 순응하며 고통 받는 모습이 나타난다. 투란도트 공주가 칼라프 왕자의 신원을 알아낼 때까지는 아무도 잠잘 수 없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다 왕자의 시녀 류라는 희생제물이 나타난다. 류는 왕자의 신원을 알고 있다. 류를 고문하는 관리들의 거친 손길에 호응해 군중들은 ‘이름을 말하라!’고 압박한다. 그러나 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이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바뀐다. ‘류, 우리를 용서해다오’라며 한없는 동정을 보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투란도트’에 나타난 군중은 쉽게 변하며 쉽게 조종당하는 존재다. 오늘날 현대인이 알고 있는 ‘민중(People)’은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의 민중은 통치의 목적이며, 민중의 의사는 위정자가 받들어야 하는 숭고한 것이다. 그런데 ‘투란도트’의 민중 혹은 군중은 왜 이런 존재로 그려졌을까?

20세기가 끝날 즈음, 영국 공영방송 BBC는 20세기를 ‘민중의 세기(People's Century)’로 정의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실제 민중의 힘은 커졌고, 특히나 2차대전 이후, ‘피플’은 서방세계와 공산진영 양쪽 모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담게 됐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비롯한 20세기 초의 파시스트들은 민중이 가진 힘에 주목하고 그들의 조직화에 큰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이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소수 엘리트에 의한 과두정oligarchy이었고, 민중은 의사결정의 주체가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파시스트가 아니었던 동시대 스페인의 사상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스페인 내전 이전에 발표한 저서 ‘대중의 반란’(La rebelión de las masas,1930)에서도 수동적이며 비인격적이고 신뢰하여서는 안되는 ‘대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현대 사회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수동적이며 비인격적인 군중의 한 분자로서 의미를 가지려 한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나태한 대중은 선동에 취약하며 폭력과 직접행동에 호소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엘리트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투란도트’에 묘사된 대중은 그 시대에 인식된 전형이었다.

오늘날, 대중은 이 같은 해석에 비해 훨씬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합목적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를 갖는 걸로 묘사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가 발달한 오늘날, 대중을 구성하는 각 인자의 표정은 예전에 비해 훨씬 읽어내기 쉬워졌다. 한 세기 전 ‘투란도트’에 묘사된, 그리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경고한, 수동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쉽게 표변하고 조종당하며, 억압에 동참하기까지 하는 대중은 오늘날 과연 사라졌을까?

 

유윤종(음악칼럼니스트)

THE MOVE  Press@ithemove.com

<저작권자 © 월간 더무브 THE MOVE,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THE MOVE의 다른기사 보기
icon관련기사 icon적과 다르게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