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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래서, ‘한국무용’은 어디로 가는가국립무용단 <맨 메이드> vs 서울시무용단 <카르멘>

 

 

<맨메이드> 국립무용단

 

(null) 신창호가 안무하고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 수행한 <맨 메이드>는 한국무용인가? 이 작품은 한국무용의 호흡을 차용한 현대무용인가? 그도 아니라면 현대무용의 어휘를 이식한 한국무용인가? 이 질문은 국립무용단이라는 단체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

 

<맨메이드>

공연이 많은 5월, 국립무용단과 서울시무용단이 비슷한 시기에 신작을 선보였다. 국립무용단은 현대무용가 신창호를 안무가로 초청해 <맨 메이드>를, 서울시무용단은 서울발레시어터의 전 예술감독이었던 제임스전을 초청해 <카르멘>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무용계에 어젠다를 제시하고 흐름을 선도해야 할 국공립 무용단체에서 이 같이 다른 장르 안무가와의 협업을 통해 신작에 도전하는 시도가 어떤 결과물로 나타날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르멘> 서울시립무용단

두 단체의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이 시도는 단체가 지속적으로 해온 창작 실험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국립무용단은 테로 사리넨이나 조세 몽탈보 등 해외 안무가와의 협업을 비롯해 안성수 안무의 <단>, 안성수와 윤성주 공동 안무의 <토너먼트>, 류장현 안무의 <칼 위에서> 등을 통해 한국무용이 안고 있는 고루함이라는 편견을 깨고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최근 몇 년간 국립무용단의 신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를 꼽는다면 ‘혁신’이 그것일 터다. 그리고 <맨 메이드>는 그러한 혁신의 한 결정체라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을 남김없이 갖추고 있다. <카르멘>은 어떤가. 한국무용의 역사를 이루는 큰 줄기의 하나인 무용극의 전통 위에 대중이 잘 알고 있는 서양의 고전을 리메이크해 얹음으로써 역시 한국무용의 고루함을 탈피하고 좁은 무용시장의 범위를 넓히고자 한 시도들인 <백조의 호수>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 세종문화회관 개관 40주년을 기념한다는 중압감이 더해졌다. 안무가의 어깨가 무거워졌을 만하다.

 

<맨메이드>

 

 

‘한국무용’이라는 글리치

 

<맨 메이드>는 아름답다. ‘인간이 만든’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아름다움의 첨단에 있다고 할 미디어아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닮고자 하는 한국무용의 몸짓을 결합해 인공미와 자연미의 경계를 묻는다. 움직임이 미디어의 보조적인 수단이 되는, 영상미디어나 미디어아트와의 융복합으로 작품을 만들면서 무용공연이 자주 빠지는 오류도 영리하게 비켜갔다. 작품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정체성, 선택, 순리, 집합체, 경계, 해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데, 사실 이 키워드들은 작품의 주요 모티브인 글리치(glitch; 불필요한 부분에 발생하는 노이즈 펄스, 컴퓨터의 일시적인 오동작) 효과를 활용해 장면을 전개해나간 4장을 제외하고는 꼭 <맨 메이드>에만 해당되는 주제들은 아니다. 그러나 3장의 ‘순리’를 제외하고는 현대무용 신작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안무노트에 등장하기 마련인 이 키워드들이 한국무용의 몸짓과 만났을 때 무대 위에서 어떻게 실현될지 궁금증을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움직임의 픽셀이 되어 무대 위에 올랐던 24인 무용수들 각각이 지니고 있는 한국무용의 호흡이 글리치로 작용했다. 같은 안무를 신창호가 속한 LDP 무용수들이 했더라면 보다 역동적이면서도 오차 없는 군무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무용의 호흡으로 단련되어온 국립무용단의 무용수들은 동일한 움직임을, 동일한 조건의 공간 내에서, 동일한 속도로 일사분란하게 수행해야 하는 일련의 조건들을 미세하게 무너뜨린다. 이를 통해 사람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오류, 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신창호가 안무하고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 수행한 <맨 메이드>는 한국무용인가? 이 작품은 한국무용의 호흡을 차용한 현대무용인가? 그도 아니라면 현대무용의 어휘를 이식한 한국무용인가? 이 질문은 국립무용단이라는 단체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국립무용단은 한국춤의 전통을 잇기 위해 존재하는 전통무용단체인가, 아니면 한국춤이라는 뿌리 위에서 동시대성을 포착하는 현대무용단체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의 삼분법이 온존해 있는 한국 무용사회에서 ‘현대춤’의 정의는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이러한 질문을 의식했는지 안무가는 2장에서 김병조와 박소영의 입을 통해 한국춤과 현대춤의 경계를 묻게 했는데, 춤으로 빈틈없이 짜여 있는 안무 속에서 소위 ‘아재개그’를 섞어 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만담처럼 풀어낸 이 장은 작품 전체로 보면 다른 장들과의 어울림 안에서 장 전체가 글리치로 기능하는 결과를 낳았다. 안무가는 춤으로 던져야 할 질문을, 이미 춤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을 무용수의 입을 빌려 되풀이함으로써 ‘춤은 춤이지 한국춤과 현대춤의 경계를 지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결론을 유도하고자 하는데, 이는 신창호라는 현대무용가를 안무가로 초청한 국립무용단에서 내놓아야 할 입장문의 발언이지, 작품 안에서 이렇듯 대사로 발화되어야 할 발언은 아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창작자가 작품 안에서 이런 대사를 통해 작품을 방어해야 할 만큼 무용계의 시선이 경직되어 있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한데, 이는 일차적으로 안무가의 창작의 자유 범위 안에 있지만 이를 하나의 어젠다로 힘 있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무용극 전통의 계승과 한국적 컨템포러리춤의 제시라는 갈지자 행보 위에서 명확한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국립무용단의 직무유기 또는 불성실이라 할 것이다.

 

<카르멘> 오정윤

오페라와 다른 한국무용, 그래서?

 

<카르멘>이 처한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지난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블루벨’이라는, 원작에도 신화에도 등장하지 않는 근본 없는 설정을 내세우며 원작의 해체도 리메이크도 아닌, 어정쩡한 재해석을 보여주었던 서울시무용단은 이번에는 <카르멘>에 도전했다. <카르멘>을 한국무용으로 옮기는 이 시도에서 오페라와의 차별점으로 내세워진 것은 오페라와 달리 돈 호세의 관점으로 극이 전개되며, 호세가 카르멘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카르멘의 사랑을 잃고 자살하는 것으로 결말이 바뀐다는 점이다.

<카르멘>이 워낙 오페라로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재해석에 나서는 후대의 창작자들은 이 작품의 원작이 오페라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을 자주 간과하는데, 원작소설은 한 고고학자가 안달루시아에서 만난 산적 두목 호세 나바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전개된다. 오페라와 다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카르멘이 아닌 호세에게로 관점을 이동시키는 것은 원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후대의 재창작에서 이 원작소설의 존재는 어쩐 일인지 곧잘 무시되며, 하여 창작자들은 원작을 지우고 돈 호세의 관점으로 작품을 전개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원작의 호세는 카르멘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녀를 고립시키고 독점하는 데 실패하자 카르멘을 죽임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소유하고자 한다. 호세에게 살인은 그가 카르멘의 유일한 남자가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서울시무용단의 <카르멘>은 호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함으로써 그를 이별살인의 가해자가 아닌 사랑을 상실한 자,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 ‘눈짓 한번’으로 한 남자의 전부를 가질 수 있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카르멘은 감옥에 끌려가는 신세를 피하기 위해 꽃을 건네며 호세를 유혹하지만, 서울시무용단의 <카르멘>에서 카르멘은 호세와 육체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듯 그의 가랑이 사이에 누워 교태 어린 몸짓으로 적극적인 유혹에 나선다. 극 후반부 갈등의 한 축으로 등장하는 에스카미요와의 사이에서 별다른 인상적인 안무나 감정을 부여받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호세가 억울해할 만도 하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사랑을 받았다 빼앗긴 자의 억울함이다.

 

<카르멘> 오정윤, 정운식

국립무용단의 <맨 메이드>가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의 다른 호흡을 솜씨 좋은 재봉사의 손놀림으로 한데 꿰매놓은 것과 달리, <카르멘>에서 굳이 발레 안무가가 이 작품을 안무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다. 카르멘을 사이에 두고 연적으로 대립하는 호세와 에스카미요는 각각 서울시무용단의 최태헌과 서울발레시어터 출신 정운식이 맡았지만 호세와 에스카미요의 듀엣 장면에서 같은 동작을 별다르지 않은 템포와 호흡으로 수행하는 두 무용수의 어울림은 굳이 한국무용수와 발레무용수가 만나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간결한 조명디자인으로 관객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고자 했다는 안무가의 변과 달리 조명은 알록달록하고, 오페라에서 붉은색 일색인 것과 달리 민화 속 다양한 색채를 활용했다는 카르멘의 의상은 아마도 섬세하게 구분지었을 미카엘라의 의상과 크게 변별력을 갖지 못한다. 호세의 군복 바지는 트레이닝복과 별 차이가 없으며, 투우사 중의 투우사인 에스카미요의 의상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있다. 조명이 작품의 배경을, 의상이 인물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다. 창작은 ‘무엇과 어떻게 다르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다. <카르멘>은 영화와 연극, 오페라와 발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판본이 존재하며, 사실 어느 한 가지 판본을 기준으로 다르게 만든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 이 익숙한 작품을 보러 오는 관객들의 눈높이 역시 낮지 않다. 서울시무용단은 오페라와는 다른 무용극을 선보이겠다는 야심에 찬 일성을 내놓기 전에 차라리 반세기를 이어온 무용극의 역사 안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 작품을 만들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국립무용단과 서울시무용단이 올 봄 나란히 올린 신작은 언제나 그랬듯이, 한국 컨템포러리무용은 무엇이며 현재의 한국무용은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돌아오는 경험을 전해주었다.

 

글 윤단우 (무용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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