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초등학생 때, 백과사전에 실린 사진을 통해 밀레의 <만종>을 처음 봤다. 크기도 손바닥만한데다 인쇄 상태도 조악한 사진이었다. 나는 농사도 짓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아이였지만, 밭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 속의 사람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 본 명화였다.

나중에 형이 모으고 있던 껌종이에서 모네의 그림을 봤을 때도 그때처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소녀시대처럼, 아름다운 것은 작아져도 아름답다. 면사포의 성긴 구멍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신부의 얼굴처럼, 아름다운 것은 조금 가려놔도 아름답다. 그렇게 작은 사각형에 갇혀 조악한 망점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명화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림이 움직이고 옆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이것은 회화가 아니다. <만종>속의 젊은 농부가 고개를 까닥까닥 한다고 해서,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더 가까이 혹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장치들은 오히려 감상을 방해한다. 그것은 작품이 갖고 있는 고유한 목소리를 왜곡하는 잡음이다. 회화는 정지화면과 침묵만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로 탄생했고 그렇게 성장해왔다. 캔버스는 대형스크린과 입체음향보다 더 실제에 가깝거나 자극적인 화면을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그런 허술함 때문에 그림을 마주한 사람이 거기에 비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영상을 통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1초에 24장의 그림을 넘겨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뒤틀렸던 일생의 모든 날들 동안 지어야 했던 눈물과 웃음을 오직 까마귀 떼가 날아가는 노란 밀밭 그림 한 장 안에 담아낼 수도 있다. 회화가 정지된 화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 종이 위에 ‘사’라는 글자 한 자가 적혀있다. 나머지 부분은 찢겨지고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읽는다. 친구와 다툰 다음날에는 ‘사과’라고 읽고, 왠지 모르게 찌뿌둥하고 나른할 때는 ‘사골’이라고 읽는다. 이것이 파편의 힘이며 정지화면의 힘이다.

요즘 미술에는 ‘미디어 아트’라는 말이 있어서 회화와 조각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을 편리하게 쓸어 담는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들어앉아 더 이상 사람들이 구경거리를 찾아 집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갤러리들은 이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어느 예술가가 홀연히 나타나 텔레비전이 갤러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갤러리가 먼저 텔레비전을 집어 삼키게 했으니 그가 ‘백남준’이다.

그래서 백남준이 결국 미술관에까지 가지고 들어갔던 그 텔레비전들의 화면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찾으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그는 화가가 빨간색 물감을 칠하듯 화면에 빨간색을 틀어놓았고, 조각가가 찰흙을 붙이듯 네모난 텔레비전을 쌓은 것이다.

텔레비전의 움직이는 화면을 붙잡고 뭔가 꾸며내려는 시도는 방송국 피디가 할 일이고, 엄밀히 말하면 미디어 아티스트는 백남준 한 명뿐이다. 콜럼버스가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달걀 하나를 깨뜨린 이후로, 달걀을 더 많이 깨뜨리거나 더 예쁘게 깨뜨리거나 더 좋은 소리를 내면서 깨뜨리거나 깨뜨리기 전에 시답잖은 농담을 한마디 하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한 소절 부른다고 해서 제2의 콜럼버스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회화를 잘게 썰고 거기에 양념을 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것은 영화치곤 지루했고, 회화치곤 산만했다. 최근에 ‘컨버전스 아트’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콘텐츠들 중에 <모네, 빛을 그리다>전만큼은 인상적이었다.

전시장 안의 사람들은 화려한 색을 뿜어내는 대형 스크린을 앞에 두고 잔잔한 음악에 파묻혀 오랫동안 한 자리에 앉아있었다. 모네의 부르주아적인 소재들이 연출해내는 스펙터클을 쫓느라, 빛과 색채에 관한 그의 진지했던 고민을 되새겨볼 여유까지 가질 수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을 크게 보니 더 아름다웠다. 역시 화려한 색채로 예쁜 그림을 많이 그렸던 클림트나 르누아르의 작품들도 이와 같이 ‘컨버전스 아트’로 포장했을 때 돋보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헬로, 미켈란젤로>전(1.26-open run 헬로뮤지엄)은 조각을 스크린에 옮기는 전에 없던 시도를 선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촬영 및 상영기술이 발달하여 조각작품을 사방으로 또 사방의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허리를 구부려가며 눈 앞에 있는 조각상을 바라 볼 때 느껴지는 감흥을 재현하는 것은 무리였다.

전시장에는 <다비드>나 <피에타>와 같이 조각을 조각으로 옮겨온 작품들도 있었지만, 복제품의 품질이 조악한데다 조각상을 비추는 조명마저 단조로워 마치 미켈란젤로를 조롱하거나 풍자하려는 의도로 세워둔 것처럼 보였다.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한 시도는 신선했다.

다만 이보다 층고가 높아 더 넓게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전시장 벽에는 전시 내용 설명글이 빼곡했는데 일일이 읽고 있자니 피로했다. 마치 큰 책 안에 들어와 있는듯했다.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당시의 미술이, 성경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위대함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점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점이었다. 전시장 벽에서 만난 많은 문장들 중에 한 문장을 이 전시의 기획자님께 돌려드리고 싶다.

“조각은 덜어내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미켈란젤로

그림 속 인물이 고개를 까닥거리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화면은 회화도 아니고, 미디어아트도 아니다. ‘컨버전스 아트’라는 이름을 붙여 관람객들이 갖고 있는 예술을 향한 목마름을 축여주고는 있지만, 전시장에 들어와있다고 해서 모든 볼거리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말랑말랑하게 만들려는 일련의 시도를 기본적으로 환영한다. 그렇게 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술에 흥미를 갖고 그 안에서 마르지 않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주객이 전도되어 예술작품이 주인공이어야 할 전시장이 최신 영상 기술의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한 사람의 예술가가 이 안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믿고 평생을 헌신해 일궈낸 성취를 한 때의 가벼운 오락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닌지, 오직 침묵과 정지로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움직임을 담아내는 고전 작품의 아름다움을 구닥다리로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에서, 전시의 작은 허물을 과장해서 말해본다. 만약 이런 걱정이 현실이 된다면, 입체음향으로 둘러싸인 대형 스크린이 조용한 껌종이에 실린 작은 사진보다 낫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기호  객원기자(화가,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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